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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말씀 묵상

창세기 - 금관을 쓴 예수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0. 20.

창세기 42장 24~38절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 곳을 떠났더니, 한 사람이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귀에 있는지라.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 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그들이 당한 일을 자세히 알리어 아뢰되,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엄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를 그 땅에 대한 정탐꾼으로 여기기로, 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확실한 자들이요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우리는 한 아버지의 아들 열두 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막내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확실한 자들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 중의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려 오라 그러면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요 확실한 자들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 하고, 각기 자루를 쏟고 본즉 각 사람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그들과 그들의 아버지가 돈뭉치를 보고 다 두려워하더니,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어느 희곡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시멘트 속에 갇힌 예수의 머리 위에 돈 많은 사장이 헌금으로 만든 번쩍이는 금관이 씌워져 있습니다. 부자와 깨끗한 사람들의 친구라고 여긴 문둥이가 그 예수를 향해 욕을 퍼붓다 토하고 쓰러집니다. 그 얼굴 위로 예수의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시멘트 예수가 말합니다. 나는 너무 오래 이 감옥에 갇혀 가난한 이들과 아픔을 나누고 싶어 기다렸다고 말입니다. 누가 가두었느냐는 물음에는 이렇게 답합니다. '바리새인들이다.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이다. 편안함과 권세에 너무 가까워서 내 말도, 가난한 이들의 울음도 듣지 못한다.'

그 시절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청년은 예수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이 세상에는 굶는 사람이 있고 억울한 사람이 있는데, 예수는 왜 공평에 관심 없는 분처럼 가만히 계십니까? 약한 사람에게는 등을 돌리고 성공한 사람 편만 드는 분을 계속 믿어야 합니까? 그 청년에게는 그런 생각을 할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는 20년 가까이 교회를 다녔지만 신앙의 본질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배운 복음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부자가 되고 문제가 풀리고, 내 가족이 잘되는 것이 복입니다. 그 잣대로 세상을 보면 가난하고 병들고 못 배운 사람들은 하나님이 돌보지 않은 사람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희극에는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재판대에 서야 할 사람들은 가난한 이를 이용한 사장과 침묵한 사회 전체인데, 희극의 제목은 '금관의 예수'입니다. 욕은 예수가 대신 먹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
왜 직무유기를 하십니까?" 하고 촛불을 듭니다. 그렇다면 예수에게 금관을 씌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시멘트를 부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역설적이게도 교회입니다. 교회가 예수를 소원 성취의 도우미, 문제 해결사로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이가 있습니다. 어른들이 아이에게 말합니다. "
저 아저씨는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사 주는 분이야." 아이는 그 아저씨를 만나자마자 장난감을 달라고 조릅니다. 사 주지 않으면 아저씨를 원망합니다. 그 아이의 잘못일까요? 처음부터 그렇게 소개한 어른들의 잘못이 더 큽니다. 교회가 예수를 번영의 보증수표처럼 가르쳤으니, 사람들은 그 수표가 부도나면 예수를 원망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떤 처지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백성답게 만들어 가십니다. 다만 그 목적이 이 땅의 가난과 불공평을 없애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상을 보게 하시고, 하늘의 삶이 무엇인지 알려 주셔서, 하늘 백성으로 빚으시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는 문둥병을 앓으면서도, 지하 무덤에 숨어서도, 총부리 앞에서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환경이 바뀌지 않아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이 땅에 있음을 그렇게 보여 주십니다.

그러니 "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런 고백이 따라와야 합니다. "하나님, 이 불편한 자리에서도 제가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배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세상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영원한 나라로 가는 길목일 뿐입니다. 예수의 머리에 금관이 씌워지는 길목은 세 곳입니다.

첫째는 성공주의와 기복신앙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잘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둘째는 이 땅의 해방을 기독교의 목표로 삼는 가르침입니다. 성도가 불의와 싸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나 자신이 먼저 그렇게 살아내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방패나 깃발처럼 앞세우는 일은 아닙니다. 십자가는 휘두르는 무기가 아니라 지고 가는 짐입니다. 예수님은 로마를 이길 힘이 충분하셨지만 싸우지 않고 당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베드로가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쳤을 때 예수님이 "
네 칼을 도로 꽂으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셋째는 도덕적 행위주의입니다.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그 착함이 나를 높이는 재료가 되는 순간입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어려운 이웃을 몇 달째 도왔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어느새 속삭임이 들립니다. '나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지, 저 사람들보다는 낫지.' 선행이 자기 점수가 되는 순간입니다. 성도는 선한 일이 나타날 때 "
제가 잘했지요?"가 아니라 "저 같은 사람 안에서 어떻게 이런 일을 하십니까?" 하고 은혜를 떠올려야 합니다. 두 문장은 비슷해 보여도 정반대의 고백입니다.

예수님도 이 차이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빠짐없이 냈습니다. 그는 멀리 서 있는 세리를 곁눈질하며 기도했습니다. "
저는 저 사람 같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세리는 눈도 들지 못하고 가슴만 쳤습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간 사람이 세리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죄가 폭로된 자리에서 자기 의도, 교만도 힘을 잃습니다. 진짜 선한 삶은 그 낮은 자리에서 나옵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방언을 하고, 산을 옮길 믿음이 있고, 재산을 다 나눠 주고, 몸을 내어 주는 희생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랑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모른 채 자기 열심으로만 한다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다'의 헬라어 '우데이스'는 숫자에 넣어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크고 멋진 일이어도 은혜를 모른 채 한 일은 하나님 앞에서 헤아려지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 본문 창세기 42장에 담겨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만나고도 바로 정체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정탐꾼으로 몰고, 시므온을 묶어 두고, 막내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요구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는 형들의 자루마다 곡식값으로 낸 돈을 도로 넣어 두게 했습니다. 자루를 열어 돈뭉치를 본 형제들은 떨며 말했습니다. "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런 일을 하십니까?" 아버지 야곱은 요셉도 시므온도 잃었는데 베냐민까지 빼앗아 가려 한다며 탄식했습니다.

요셉은 복수하려고 장난을 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 일을 통해 형들이 자신의 죄를 마주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를 내어주면서까지 죄인을 살리시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했습니다.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될 이들에게 언약의 복이 전해지려면, 먼저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에게 부어진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죽음 가까이까지 몰았다가 살려 내는 길로 이끕니다. 이때 요셉은 하나님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해되지 않는 일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형들처럼 "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하고 묻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이 우리의 죄인 됨을 드러내면서도 우리에게 부어진 은혜를 깨닫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어느 목사가 최근 상담 전화를 몇 통 받았습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아들을 둔 아버지, 술을 끊지 못하는 남편 때문에 마음 졸이는 장로의 아내, 기억을 잃어 가는 어머니를 둔 권사, 암에 걸린 딸을 안타까워하는 노 전도사였습니다. 사정은 모두 달랐지만 질문은 같았습니다. "
그래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목사는 분명하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병도 중독도 치매도 하나님의 구원을 막지 못합니다. 그분들을 통해 하나님은 교회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은혜의 크기는 그런 것들과 비교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도 고백하게 됩니다. 나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수시로 잊고 사는 사람이고, 마음이 이것저것에 매여 있는 사람이며, 어떤 병보다 무서운 죄라는 병에 걸린 사람이라고, 그럼에도 구원하신 은혜가 이토록 풍성하다고 말입니다.

이제 예수의 머리에서 금관을 벗겨 드릴 때입니다. 금관 쓴 예수와 어울리려면 자격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예수가 그 금관을 우리에게 씌워 주려고 오셨다는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
하나님, 저는 여전히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런 저를 작은 예수로 보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고백이 나오는 자리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것만이 우리가 붙들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