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43장 1~15절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 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여 이르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의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스라엘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질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시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묻는 말에 따라 그에게 대답한 것이니 그가 너희의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
신라 시대, 김유신에게는 보희와 문희라는 두 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언니 보희가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서라벌 산에 올라 소변을 보는데 온 서라벌이 잠기는 꿈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동생 문희는 비단을 주고 그 꿈을 사 버렸습니다. 얼마 뒤 김춘추가 놀러 왔다가 옷고름이 떨어졌고, 그것을 달아 준 사람이 문희였습니다. 둘은 결혼했고 문희는 정말 서라벌의 어미, 태종무열왕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언니 보희는 꿈을 판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꿈에는 힘이 있나 보다고 말입니다. 지금도 돼지꿈이니 용꿈이니 하며 꿈을 사고파는 이들이 있습니다. 꿈이라는 말이 밤에 꾸는 꿈과 이루고 싶은 소원을 함께 가리키는 것도 그래서일 것입니다. 이루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 잠결에 본 그림에도 기대를 걸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성도는 자기 꿈을 이루려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 자기 삶에서 이루어져 가는 사람입니다. 바닷가에서 파도타기를 하는 사람을 떠올려 보면 쉽습니다. 파도는 그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는 밀려오는 파도 위에 올라탈 뿐입니다. 하나님의 꿈도 그렇게 성도의 삶을 덮치며 밀려옵니다. 그 파도를 거슬러 서면 만신창이가 되지만, 올라타면 멀리까지 실려 갑니다. 그 꿈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는 것." 내가 주인인 줄 알고 살던 옛 사람이 물러나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새 사람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어린 시절 꾼 꿈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리고,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히는 끝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요셉이 자기 꿈을 이룬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애굽으로 보내 구원이 무엇인지 가르치시려는 큰 계획 속에서, 요셉은 도구로 쓰였을 뿐입니다. 그 꿈은 훗날 십자가에서 활짝 피었습니다. 죽어야 할 사람들이 무죄한 예수님의 고난으로 살아나고, 그 참된 왕께 머리를 숙이게 되는 이야기가 요셉의 삶에 이미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자 온 세상에 큰 기근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요셉 앞에 엎드려 은혜를 구해야만 곡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기근은 세상의 참모습을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 겉으로는 풍족해 보여도 속은 굶주려 있습니다. 아무리 벌어도 부족하고 아무리 칭찬을 들어도 허전합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요즘 좀 지쳐서 그렇지, 원래 이게 행복이야" 하며 스스로를 달랩니다. 사실은 참 기쁨과 참 평안이 굶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빈자리는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라서 다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바닥에 구멍 난 장독에 물을 아무리 부어도 차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그 기근 속에서 야곱의 집안이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애굽에 곡식을 사러 갔던 아들들은 시므온을 볼모로 두고 돌아왔습니다. 총리는 "막내 베냐민을 데려와야 곡식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식량은 바닥나고 손자들까지 굶어 가는데도 야곱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베냐민은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남긴 마지막 아들이었습니다. 요셉을 잃은 뒤로 야곱의 행복은 이 아들 하나에 모두 걸려 있었습니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할머니가 사탕 한 봉지를 사 들고 와 손자에게 내미십니다. 그런데 아이가 한 손에 사탕 한 알을 꽉 쥐고는 놓지 않습니다. 그 손으로는 봉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할머니가 "그거 하나만 놓으면 이 봉지를 다 줄게" 하셔도 아이는 주먹을 펴지 못합니다. 야곱이 꼭 그랬습니다. 베냐민만 놓으면 야곱은 애굽 총리의 아버지로서 기근과 상관없이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빼앗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것을 주시려고 그의 손을 펴게 하시려던 것이었습니다.
기근이 더 깊어지자 유다가 아버지 앞에 나섰습니다. "아이를 저와 함께 보내십시오. 그래야 우리와 아버지와 어린것들이 다 삽니다." 어린 손자들까지 죽는다는 말에 야곱은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라 고백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의 행복의 뿌리는 베냐민이었는데, 이제 그 뿌리가 하나님께로 옮겨 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냐민보다 소중한 분이시니, 가장 귀한 것을 가져가시더라도 따르겠다는 항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한 사람의 손을 펴게 하시려고 온 세상에 기근을 허락하셨습니다. 세상 역사가 하나님의 백성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답답해집니다. 뒷이야기를 이미 알기 때문입니다. "야곱아, 그거 놔! 그것만 놓으면 상상도 못 할 복이 기다리고 있어!" 하고 외치고 싶어집니다. 아마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도에게 베냐민은 무엇일까요? 부모에게는 속을 태우는 자녀가 그렇습니다. 시험을 망친 아이, 길을 벗어난 아이를 두고 밤잠을 설치는 부모는 많습니다. 그런데 속이 타는 까닭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이가 어찌 될까 걱정해서라기보다 내 기대대로 되지 않아서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자녀가 어느새 나의 연장이 되어, 아이의 성적과 직장이 곧 내 체면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 아이도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한 사람입니다. 정말 걱정해야 할 것은 "이 아이가 하나님의 구원에서 빠지면 어쩌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을 쥔 손을 펴고, 아이를 하나님 앞에 올려놓은 채 그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베냐민을 바치는 일입니다. 무책임한 포기가 아니라 믿음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재산이나 명예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것에 매달리는 까닭은 세상의 잣대로 나를 드러내고 남보다 앞섰다는 작은 만족을 얻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빠져나가면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값어치는 세상의 힘이나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 주십니다.
"그래도 걱정되는 걸 어떡해요." 맞는 말입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고 걱정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염려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염려하는 내가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일이 이미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예수님 안에 넣어 십자가에서 함께 죽이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 죽은 사람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걱정이 밀려올 때마다 "나는 이 세상에 대해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십자가를 붙드는 것, 그것이 염려에서 조금씩 풀려나는 길입니다. 세상에서 이름을 내고 자랑하려 애쓰는 일도 이미 죽은 사람에게 화장을 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름을 남기려고 달려가고 있는지 물어볼 일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부자의 이름은 그냥 '부자'입니다. 이름을 잊은 사람을 "그 왜, 머리 크고 다리 짧은 사람" 하고 부르듯이, 사람이 평생 좇은 것이 곧 그의 이름이 되어 남습니다. 돈 많은 사람, 똑똑한 사람, 높은 사람, 착한 사람, 모두 세상이 붙여 주는 이름입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경험하고 기뻐하며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 세상에서 이룬 업적은 곧 잊히지만 하늘에 기록된 이름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기록되기까지 지워진 이름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한때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달라"고 간청했지만, 그의 이름으로는 한 사람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이 십자가에서 지워짐으로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습니다. 성도는 그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비눗방울과 같습니다. 로또에 당첨된 날의 기쁨이 평생 가던가요? 며칠 지나면 그 돈도 모자라게 느껴집니다. 자식이 명문대에 합격한 기쁨도 금세 시들해집니다. 반면 가난하고 아프고 기적 같은 일 하나 없는 날에도 흔들리지 않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아들이라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때로 베냐민을 빼앗으시는 것은 성도를 그런 사람으로 빚으시려는 것입니다. 부자라는 이름도, 똑똑하다는 이름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이면 족합니다.
사탕을 쥔 아이를 할머니는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작은 주먹이 펴지기만 하면 봉지 가득한 선물이 쏟아질 텐데 하면서 말입니다. 문제는 아이 스스로는 그 주먹을 펼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를 기근 속으로 이끄시고, 빼앗김을 통해 손을 펴게 하십니다. 그 길의 끝에서 성도는 알게 됩니다. 자기 손을 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 베냐민을 놓고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이 하늘의 복을 누립니다. 하늘의 복은 빈손으로 받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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