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44장 30~34절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영국은 한때 세계 기독교의 중심이었습니다. 스펄전과 조지 뮬러, 마틴 로이드 존스 같은 목사님들이 나왔고 영적 대각성의 불길이 일어난 땅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곳의 많은 예배당은 술집이 되었습니다. 첨탑 위 십자가를 그대로 단 채 장사하는 가게도 있다고 합니다. 선교사를 조선으로 보내며 눈물로 기도하던 웨일즈의 교회도 설교할 목사를 구하지 못해, 지금은 선교사의 사진과 편지를 전시해 놓고 관광객을 맞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유를 같게 말합니다. 교회가 말씀의 권위를 가볍게 여기고 삶의 풍요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힘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성도의 길로 가리킨 것은 자기부인과 십자가였는데, 교회는 성공과 물질을 좇았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같은 길 위에 서 있지 않은지 돌아볼 일입니다. 기도하면, 헌금하면, 봉사하면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가르침이 곳곳에 퍼졌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목적지는 소원 성취가 아니라 자기부인입니다.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 성도에게는 가장 온전한 성공입니다.
한 목사님이 십오 년 전 한강 둑에 앉아 강물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강은 멈춘 듯 천천히 흘렀지만 분명 아래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문득 이 강이 끝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바다였습니다. 강은 가장 낮은 곳에서 바다를 만나 한 몸이 되고, 더 큰 삶을 삽니다. 그는 무릎을 쳤습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을 윗자리에 모시고 아래로 내려갈 때 비로소 큰 삶에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왜 끝없이 올라가려고만 하는가? 그 자책 속에서
짧은 시 한 편을 노트에 적었습니다. 세상 만물은 아래로 흐릅니다. 만유인력도 모든 것을 아래로 끌어당깁니다. 위로 기어오르려는 존재는 사람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서 있고, 그 십자가를 만나려면 우리도 내려가야 합니다. 성도의 인생이 아래로 내몰리는 시험으로 이어지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창세기 44장은 끝없이 올라가려던 사람들이 종의 자리로 내려앉는 장면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오래 시험했습니다. 그들이 은잔을 훔쳤다는 누명을 씌우기까지 했으니 모함이라 불러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함이었습니다. 요셉이 원한 것은 복수가 아니었습니다. 동생을 팔아넘겼던 형들이 자기 죄를 똑바로 보고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형들과 아버지 야곱은 처음에 선물로 일을 풀려고 했습니다. 유향과 꿀과 몰약을 들고 갔습니다. 하지만 애굽의 총리인 요셉에게 그런 것은 아무 값어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같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가 무엇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헌금이나 업적이 아니라 자기부인에서 나오는 이웃 사랑, 곧 우리의 됨됨이입니다. 헌금과 봉사는 그 사랑에서 저절로 맺히는 열매이지 하나님의 요구 조건이 아닙니다. 결국 유다가 나섭니다. 아버지가 막내를 잃으면 돌아가실 것이라며, 자신이 동생 대신 종이 되겠다고 청합니다. 형제들의 죄를 홀로 짊어지겠다는 이 모습에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줍니다. 그래서 유다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오십니다.
하나님이 왜 당신의 백성을 이렇게 낮추시는지, 신명기 8장이 답을 줍니다. 하나님은 광야 사십 년을 두고 "낮추시고 시험하시고 주리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광야는 곧 성도의 인생입니다. 요셉의 가족이 기근을 만나고 감옥에 들어가고 모함까지 겪은 것도 그 광야였습니다.
이 '낮추다, 주리게 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아나'입니다. 같은 말이 레위기 16장 속죄일 규례에 나옵니다. 이날 이스라엘은 "스스로 괴롭게" 해야 했는데, 그 구체적인 행동이 금식이었습니다. 속죄일은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의 죄를 용서받는 날입니다. 이날 이스라엘은 하루를 굶으며 죄가 만든 고통을 몸으로 겪고, 용서가 곡식이나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니 금식은 소원을 이루려 굶으며 치성을 드리는 일과 전혀 다릅니다. 죄를 슬퍼하고, 낮아지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금식은 성도의 광야 인생을 한 단어로 줄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금식을 명하시고 곧바로 밀과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는 풍성함을 약속하신 것을 요엘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낮아지고 굶주리는 시간은 풍요와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요셉의 형제들도 기근과 모함을 통과한 뒤에야 고센 땅의 복을 누렸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밥을 굶어야 할까요? 마가복음 2장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예수님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데 어떻게 금식하겠느냐고 하시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금식은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는데, 바로 그 신랑이 눈앞에 계시니 이제는 잔치를 열 때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는 속죄일의 제사와 금식이 장차 올 좋은 것의 그림자였다고 설명합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죄를 없앨 수 없었습니다. 참 제사와 참 금식은 예수님이 이루셨습니다. 주님이 우리 대신 주리시고, 갇히시고, 수난당하시고, 몸이 찢기셨고, 그 금식이 우리에게 넘겨져 우리가 금식한 것으로 인정됩니다. 그래서 밥을 굶는 금식은 더 이상 요구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요구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제사가 새 모습으로 바뀌었듯 금식도 새 금식이 됩니다. 로마서는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고, 이사야 58장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이렇게 말합니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고, 억눌린 사람을 자유케 하고, 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고, 떠도는 가난한 이를 집에 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삶을 이어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낮추고 시험하십니다. 이기적인 삶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방향을 돌리시려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씌운 누명에 이유가 있었듯, 성도가 겪는 모함과 시험과 주림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굶주림과 시험과 기근을 이미 가져가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공로로 가나안에 들어와, 그 과정을 잠시 삶으로 겪고 있을 뿐입니다. 이 금식 같은 인생 속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경외하는 백성으로 빚어지면 됩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이 몇 데나리온에 일희일비하겠습니까? 공짜로 백억 달러짜리 수표를 받은 사람이 지갑 속 몇십 불을 소매치기당했다고 끝까지 쫓아가 감옥에 보내려 들겠습니까? 아마 웃으며 용서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과 영생은 그 수표와 비교할 수 없이 큽니다. 세상에서 조금 손해 보는 일은 그 앞에서 가볍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이 세상 누구보다 성공한 인생을 사는 분들입니다. 지금 겪는 기근과 시험과 모함은 모두 가나안을 위한 것이니, 잘 견디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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