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려 하노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애굽기 3:8,12)
모세가 양 떼를 몰던 날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때 그는 이집트 왕궁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파라오의 손녀 아들, 제국의 엘리트, 당대 최고의 지식과 힘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인 그가 지금은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단순한 추락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이야기를 이렇게 읽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소명이 있다.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동기부여 강연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출애굽기 2~3장이 실제로 말하려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이 본문의 주어는 끝까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셨습니다. 하나님이 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려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도구일 뿐이고, 심지어 그 도구조차 자신이 준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여러 해 후에"라는 표현을 원어로 풀면 '채워진 날이 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이 단순히 흘러간 시간이 아니라, 무언가로 채워진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40년 동안 무엇이 채워졌을까요? 왕궁에서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힘으로 구하려 했습니다. 이집트 사람을 때려죽이는 방식으로 억압에 맞서려 했습니다. 그것은 틀린 방향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방법이 완전히 잘못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지혜로 무언가를 이루려 했습니다. 그 결과는 도주였고, 광야였고, 양 치는 생활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모세는 겉 사람이 무너지는 경험을 합니다. 화려한 이름도 없고, 왕궁의 권력도 없고, 이집트의 학식도 소용없는 곳에서 그는 그냥 한 명의 이방인 나그네였습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는데, 그 뜻이 '나는 이방 땅에서 나그네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그 이름 속에 담았습니다.
나그네, 소속 없는 사람, 고향도 없고 힘도 없는 사람, 그런데 바로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사람이 비워져야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질 수 있다는 오래된, 그러나 언제나 낯선 진리입니다.
그 시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파라오는 바뀌었지만 억압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서 잠깐,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부르짖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비로소 움직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 언약이 성취될 때가 되었고, 그 때를 향해 역사가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부르짖음은 그 과정의 일부였지, 구원의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이가 울어야 생겨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아이의 울음은 부모의 사랑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하게 하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고통받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압제받는 동안, 하나님은 그 고통 안에 함께 계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셨다"는 말의 깊이입니다.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완전한 동일시, 너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라는 선언입니다.
어느 날 모세가 양 떼를 이끌고 호렙 산 근처를 지나다가 이상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는 것입니다. 떨기나무는 가시가 있는 광야 식물입니다. 성경에서 이것은 저주받은 땅의 상징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상징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에게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하셨던 그 말씀 속의 식물입니다. 아름다운 나무가 아닙니다. 쓸모없고, 척박하고, 상처를 주는 식물입니다.
그 떨기나무는 모세이고,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잊고 애굽적 방식으로 살려 했던 모세, 그리고 이방 땅에서 정체성을 잃어가던 이스라엘, 그 황폐하고 가시 같은 존재에게 여호와의 불꽃이 임합니다. 그런데 타지 않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불은 소멸하는 불이지만, 언약 안에 있는 자는 그 불 속에서 타 없어지지 않습니다. 불꽃이 임해야 정화가 되고, 정화가 되어야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지만, 그 불이 그들을 삼켜버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불꽃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겪는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병, 상실, 관계의 파탄, 뜻하지 않은 실패들. 우리는 흔히 그것을 하나님의 부재로 읽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하지만 떨기나무의 상징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불꽃이 임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임하시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증거입니다.
모세가 그 신기한 광경을 보러 가까이 다가가려 할 때,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십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이것은 소유권의 포기를 의미했습니다. 자기 권리를 내려놓는다는 행위입니다. 모세는 그 산, 그 장소, 그 상황에 대한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권자이십니다. 그리고 그 땅은 하나님이 임하셨기 때문에 거룩한 땅입니다. 장소 자체가 원래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그곳을 성전으로 만듭니다.
이것은 모세에 대한 요구이면서 동시에 우리에 대한 요구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려면 먼저 자기 소유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이 사역을 이끈다', '내가 이 공동체를 세운다'는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하신 곳에 내가 초대받았다'는 의식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예수님은 후에 이 구절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시고,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지금도 살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언약은 죽음을 넘습니다. 시간을 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400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지금 이스라엘의 신음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은 그 오래된 언약 때문인 것입니다.
모세는 그 말씀을 듣고 두려워서 얼굴을 가립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 속에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나는 죽은 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자기 인식이 모세를 비로소 쓸 만한 도구로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됩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건져내고." 이 짧은 문장이 출애굽기 전체를 요약합니다. 구원은 인간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모세의 노력이 이스라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내려가셔서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더 깊은 데를 가리킵니다. 언약의 완전한 성취, 즉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친히 이 땅에 내려오시는 성육신을 미리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호렙 산에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은 결국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완성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완성이 선포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은 단순히 좋은 농지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삶, 하나님의 왕국이 임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말씀의 풍요. 그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리라." 모세가 묻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여 내리이까?" 이 질문은 40년 전의 모세였다면 하지 않았을 질문입니다. 40년 전의 모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왕궁의 엘리트, 이집트의 지혜를 갖춘 자였습니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모세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더 정확히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안 것입니다. 이것이 40년 광야가 만들어낸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모세가 누구인지에 대한 답을 주지 않으십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그것이 전부입니다. 네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구원의 근거는 모세의 자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당신에게도 소명이 있으니 사명감을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없어도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당신의 준비 상태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광야 같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하나님은 당신 안에 무언가를 채우고 계십니다. 그리고 때가 차면, 하나님은 당신의 황폐함 속으로 불꽃처럼 임하십니다. 당신을 태워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통해 당신보다 훨씬 크신 분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떨기나무는 타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임하신 곳에서는 아무것도 그분의 불꽃에 삼켜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불꽃 속에서, 황폐하고 가시투성이였던 존재가 하나님이 임하셨기 때문에 거룩한 땅이 됩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언제나 우리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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