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애굽기 3:14~15)
광야는 사람을 지웁니다. 40년이라는 세월은 짧지 않습니다. 한때 애굽의 왕궁에서 자랐고, 최고의 학문을 배웠으며, 언젠가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는 꿈을 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한 순간의 폭력으로 산산이 부서졌고, 그는 도망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동으로 늙어 갔습니다. 모세라는 이름은 어느 순간부터 그저 장인 이드로의 사위, 게르솜의 아버지, 양 떼의 목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 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찾아오신 것은 모세가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모세 없이는 일이 안 된다거나, 모세만큼 탁월한 인물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길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애굽의 지혜와 왕궁의 권세로 무장했던 그 모세가 완전히 지워진 뒤에야,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 앞에 서게 하셨습니다. 그래야만 이 모든 일이 모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으로 이루어진 것임이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모세가 보인 반응은 당당한 수락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라는 말은 겸손이 아니라 거부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13절).
이 질문은 표면상으로는 합리적인 요청처럼 들립니다. 백성들이 물어볼 것에 대비한 답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다는 것은,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직 모른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한 상태,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상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가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읽고, 기도도 했지만, 정작 위기의 순간이 오면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요? 그분이 제 상황을 아시기는 한가요?"라고 묻습니다. 지식으로는 알고 있지만 그 이름과 하나 되지 못한 것입니다. 모세의 질문이 바로 그런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하나님을 아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빌립이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청했을 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인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 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동일하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철학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14절). 히브리어로 '예흐예 아셰르 예흐예', 직역하면 '나는 나다'입니다. 이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는 단순하지만 심오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외의 모든 존재는 다른 무언가로부터 비롯됩니다. 어머니의 몸에서, 땅의 흙에서, 누군가의 결정에서.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디서도 비롯되지 않으십니다. 존재의 근원이 오직 자기 자신이신 분입니다.
신약에서 이 표현은 그리스어로 '에고 에이미'가 됩니다. 예수님은 폭풍이 이는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요 6: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문에서 이 말은 '에고 에이미', 곧 '나는 나다'입니다. 광야의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셨던 그 하나님이, 이제 육신을 입고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이름과 몸이 하나가 된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이름을 하나 더 알려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15절). 이것이 바로 '여호와'라는 이름의 내용입니다. 추상적인 존재론적 선언에 그치지 않고, 역사 속에서 구체적인 사람들과 언약을 맺으신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이름이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15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그저 '여호와'라는 단어를 기억하라는 뜻으로 읽으면 너무 좁게 읽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호 12:5). 그렇다면 그 이름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은 답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대대로 기억하게 하시는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원은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는 사회적 서비스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자기 언약을 지키시는 행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이삭과 야곱에게 반복하셨고, 모세 앞에서 다시 확인하신 그 약속, "내가 반드시 이루리라"의 최종 형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바울의 고백 하나가 이 모든 것을 가장 아름답게 요약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 헬라어 원문에서 "내가 나 된 것"은 '에고 에이미'입니다. 하나님만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나는 나다 라고 말씀하셨던 그 이름이, 이제 한 인간의 고백 속에 녹아듭니다.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박해했던 자임을 잊지 않습니다. 자신이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없음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 하나 되어,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에고 에이미', 내가 나 된 것입니다.
한 도예가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그는 자신의 솜씨를 자랑했습니다. 흙을 빚고 불에 굽는 기술이 뛰어나 명성이 높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마에서 꺼낸 가장 아끼던 항아리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그는 깨진 조각들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전통 기법인 금계랍으로 금으로 그 조각들을 이어 붙였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항아리는 이전보다 훨씬 아름다웠습니다. 금이 간 자리마다 빛이 흘렀습니다.
도예가는 비로소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솜씨가 아니라, 부서진 자리를 채운 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의 '에고 에이미'가 그런 고백입니다. 부서진 자리를 십자가가 채웠습니다. 없음의 자리에 존재가 들어왔습니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 왕은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가 가도록 허락하지 아니하다가"(19절). 구원은 인간의 설득이나 교섭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 손"을 드실 때에만, 바로의 완악한 마음이 꺾입니다.
손은 능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강한 손이라는 것은, 구원하는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그 손의 최종적인 형태는 십자가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십자가의 도가 …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여인들은 애굽 이웃들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나갑니다(21~22절). 400년의 노예 생활 끝에, 빈손이 아니라 전리품을 들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단순히 억압에서의 해방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율법의 세계, 죄와 사망의 세계를 떠나면서 그 세계가 결코 줄 수 없었던 것인 예수 그리스도를 얻게 된다는 상징입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이렇게 청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18절). 그러나 실제 출애굽은 사흘 만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두 달 넘게 광야를 걸어 시내 산에 도착했습니다. '사흘 길'은 여정의 거리가 아니라 구원의 구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애굽을 떠나고, 광야를 지나며, 약속의 땅에 이르는 길, 그 삼 단계의 여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됨과 부활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마 16:21)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의 사흘 길은 이미 그 부활을 향해 가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름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언약이고, 약속이며, 성취입니다. '나는 나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이 땅에 이름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 이름이 예수입니다. 그 이름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가 됩니다. 부서진 자리에 금이 흐르듯, 없음의 자리에 존재가 채워지듯, 은혜로 된 '나'가 되는 것입니다.
빈손으로 광야에 서 있는 모세에게 찾아오셨던 하나님이, 오늘도 그렇게 찾아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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