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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출애굽기

출애굽기 - 모세의 다섯 가지 만남이 열어 주는 구원의 길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10.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 하시매 그가 가서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에게 입맞추니,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출애굽기 4:18,20,24,27,29~31)

떠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습니다. 익숙한 것들과 헤어지는 것, 낯선 땅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사십 년을 미디안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치며, 아내 십보라와 함께 자녀를 낳으며 살아온 세월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것을 뒤에 두고 애굽을 향해 떠나야 합니다.

그는 먼저 장인 이드로를 찾아가 허락을 구합니다.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보려 합니다." 이드로는 묻지 않았습니다.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말했습니다. "평안히 가라." 히브리어로는 '레크 레샬롬', 샬롬 안으로 걸어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평안을 향해 가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네 안에 평안이 있으니 그 평안을 동행하고 가라는 말입니다.

모세가 말한 '
돌아가다'는 히브리어로 '슈브'인데, 이 단어에는 단순한 귀환이 아니라 '회복'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지'를 확인한다는 표현에 쓰인 '하이'는 '생명'이라는 단어입니다. 즉 모세의 이 여정은 형제들의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생명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드로는 그것을 직감했는지 모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이드로를 통해 모세의 사명을 한 번 더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이런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우리가 두렵고 망설여질 때, 가장 가까운 사람의 입술을 통해 "
평안히 가라"는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 말씀은 사람의 입에서 나왔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의 보증이 있습니다.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19절). 인간의 위협은 하나님의 구원을 막지 못합니다. 헤롯이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 아이들을 모두 죽였어도 아기 예수를 제거하지 못한 것처럼 말입니다.

길을 떠나는 모세의 손에 지팡이 하나가 들려 있습니다. 본문은 그것을 특별히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부릅니다(20절). 왜 그렇습니까? 그 지팡이는 한때 땅에 던져져 뱀이 되었다가 다시 모세의 손에 잡히자 지팡이로 돌아온 물건입니다. 저주에서 회복된 것, 뱀의 형상에서 다시 생명의 도구로 되찾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모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지팡이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는 하나님의 약속이 모세의 손 위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취한 것입니다. 모세가 무언가를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출발하는 모세에게 묘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리라"(21절). 이 말씀은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특별히 나쁜 마음을 심어 주셔서 이스라엘을 놓아주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
완악하게 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자크'는 '강하게 하다, 견고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바로의 마음 속에 이미 있던 것이 이적 앞에서 더욱 굳어지는 것이 완악함입니다. 마치 같은 햇빛이 밀납은 녹이고 진흙은 굳히듯, 하나님의 이적 앞에서 바로의 본심이 낱낱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어떤 사람은 더욱 완고하게 자신의 의를 고집합니다. 종교인들이 예수님을 가장 격렬하게 거부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자기 의를 무용지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자기 의를 붙드는 것이 완악함입니다. 바로는 단지 그 완악함의 전형적인 초상을 제공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22절). '장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베코르'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언약의 세계에서 장자는 다른 아들들을 위해 먼저 죽는 존재입니다. 먼저 된 자가 죽어야 나중 된 자가 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로 부름받았고, 그 부름은 죽음을 통해 참된 장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는 역할이었습니다. 애굽의 장자는 죽음으로 끝났지만, 이스라엘의 장자는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가리켰습니다.

그리고 이 여정에서 가장 난해한 장면이 펼쳐집니다. 길을 가다 숙소에 머물던 모세를 하나님께서 죽이려 하신 것입니다(24절). 방금 사명을 주시고, 지팡이를 들려 보내신 분이 왜 갑자기 모세를 죽이려 하실까요? 22절의 말씀이 그 열쇠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장자라면, 그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가는 모세 또한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장자는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의 아들 가운데 할례를 받지 않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할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닙니다. '
카라트', '잘라내다, 언약을 세우다'라는 동사로 표현되는, 언약의 핵심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할례 언약은 육을 잘라냄으로써 언약의 아들로 서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언약을 어기는 것은 언약으로부터 잘려 나가는 것입니다.

십보라는 즉각 돌칼을 들어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잘라낸 포피를 모세의 발에 갖다 댔습니다. 이 행위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들의 할례가 모세 대신 이루어진 죽음의 상징입니다. 십보라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피 남편이로다"라는 말에서 '피 남편'은 죽음으로 완성된 남편이라는 뜻입니다.

십보라는 교회로서, 그의 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모세의 죽음에 동참한 것입니다. 마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으며 십자가 죽음에 먼저 동참한 것처럼 말입니다(요 12:1~3, 7). 이 사건 후 십보라와 아들은 미디안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미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홍해를 건너는 죽음을 다시 겪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가운데 합류합니다(출 18:2~5). 죽음을 먼저 통과한 자는 다시 그 죽음의 길을 되밟지 않아도 됩니다.

한편 하나님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광야로 나가 모세를 맞으라"(27절). '광야'의 히브리어 '미드바르'는 '말씀'을 뜻하는 '다바르'에서 온 말입니다. 광야는 말씀이 살아 있는 곳입니다. 아론이 광야로 나간 것은 자신의 결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이끌어 낸 것입니다.

두 사람은 "
하나님의 산", 율법이 아니라 언약 안에서 세워지는 하나님 자신, 그 가운데에서 만나 입맞춤으로 하나 되었습니다. '나샤크','입맞추다, 다스리다' 이 단어는 단순한 인사가 아닙니다. 같은 말씀을 말하고, 같은 말씀의 다스림 아래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각자가 자기 방식대로 살아오던 두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사명으로 묶인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한 목소리가 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가 자신을 내려놓을 때만 가능합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도 이와 같다. 내 방식, 내 경험, 내 고집이 광야에서 내려놓아질 때, 비로소 하나의 말씀 아래 하나의 공동체가 됩니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아 말씀을 전하고 이적을 보이자, 백성들이 믿고 경배했습니다. 모세가 두려워했던 바로 그 반응인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리이다"(4:1) 반대로, 백성들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은근히 그 믿음의 속내를 드러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31절) 믿고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감동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언약 성취라는 거대한 구속 역사가 아니라, 자신들의 고난이 해소될 것이라는 기대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믿음의 민낯입니다. 병이 낫고, 사업이 풀리고, 자녀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 앞에서 우리는 쉽게 경배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가중되자 백성들은 즉각 모세와 아론을 향해 원망했습니다(출 5:21). 기대가 어긋나자 신앙이 흔들린 것입니다. 이것이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죄의 권세에 매인 우리의 현실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고난이 오면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닿아 있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성도와 교회는 매일 긍휼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우리가 긍휼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날마다 고백하는 자리, 그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출발이 이루어지는 자리입니다.

모세의 다섯 가지 만남은 하나의 진실을 향해 수렴됩니다. 구원은 인간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드로의 축복도, 하나님의 지팡이도, 숙소의 죽음도, 광야의 입맞춤도, 백성의 경배도, 그 모든 것의 배후에 하나님의 손이 있습니다. 인간의 위협은 그 구원을 막지 못하고, 인간의 완악함은 그 계획을 뒤집지 못하며, 인간의 연약한 믿음조차 하나님의 긍휼 안에서 붙들립니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서
"평안히 가라"는 말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이제 남은 것은 그 평안을 들고 각자의 애굽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