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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출애굽기

출애굽기 - 여호와를 아는 것이 구원이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20.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출애굽기 6:7)

어느 시골 마을에 오랫동안 무너진 집에 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붕에서는 빗물이 새고, 벽은 곰팡이로 가득하고, 겨울이면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건축가가 찾아와 말했습니다.
"이 집을 완전히 새로 지어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집주인은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건축가가 일을 시작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뜻밖에도 낡은 벽을 허무는 것이었습니다. 기둥을 뽑고, 천장을 걷어냈습니다. 하루가 지나자 집은 아예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집주인은 분노했습니다. "당신이 집을 고쳐준다더니, 오히려 내 집을 다 빼앗아 버렸소!" 그런데 건축가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낡은 것이 남아 있는 한, 새 집은 설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5장과 6장의 이야기는 바로 이 장면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의 호소를 들은 뒤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는 것이다." 그는 짚도 주지 않으면서 벽돌 수량은 그대로 채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잔인한 군주의 억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훨씬 깊은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가 "게으름"이라고 부른 것, 즉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그 열망을 인간의 열심으로 대체하라는 요구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 언제나 인간에게 내미는 처방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 힘쓴 것입니다(롬 10:2-3). 벽돌을 만드는 손은 바쁩니다. 그러나 그 손이 바쁠수록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발은 멈춥니다. 바로의 논리는 고대 애굽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작동하는 논리입니다. '
더 열심히 살면 된다, 더 노력하면 된다, 더 부지런하면 된다.' 이 말들이 인간의 귀에 얼마나 합리적으로 들리겠습니까?

고통이 가중되자 이스라엘 관리인들은 모세와 아론을 만나 소리쳤습니다.
"당신들이 우리를 바로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했소." 분노는 하나님의 사자에게로 향했습니다. 이 장면은 신앙생활 가운데 많은 사람이 경험하는 어떤 순간과 정확히 겹칩니다. 예수를 믿기 시작했는데 오히려 상황이 나빠진 경험, 기도를 드렸는데 오히려 문이 닫힌 경험, "하나님이 나를 위하는 분이라면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이 물음은 진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물음 속에는 하나의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존재하신다는 전제입니다.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한다"는 표현은, 앞서 이스라엘이 바로에게 호소하며 했던 말인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출 5:3) 정확히 대조를 이룹니다. 이 대비는 의도적입니다.

성경은 지금 두 종류의 칼을 나란히 놓고 있습니다. 바로의 칼, 즉 인간의 열심과 행위로 세워지는 의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두 칼을 혼동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학대가 더 가중되었습니다." "학대"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아'는 '악하다, 나쁘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나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선악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내게 유익하면 선이고, 내게 고통을 주면 악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역사는 수평선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직으로 내려가는 과정입니다. 더 깊이 내려갈수록 인간의 죄가 더 선명하게 드러나고, 그 드러남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홀로 빛납니다. 이사야는 이 구조를 메시야의 고난 속에서 보았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 53:4~5)

우리는 고난당하는 종을 보며 '
저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다'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선악 판단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바로 구원의 통로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고통 속에서 "이것이 구원인가?"라고 의심한 그 순간이, 사실은 구원이 가장 깊이 작동하고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이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전능의 하나님",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는 흔히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 이름의 본래 의미는 훨씬 더 깊이가 있습니다. 언약을 주셨으면 반드시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 그 신실함에서 전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엘 샤다이는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전능이 아니라, 자신의 말씀을 완성하는 전능입니다.

그리고 '
여호와'는 그보다 더 가까운 이름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엘로힘)이 역사 속으로 직접 들어오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하고, 그 후손을 직접 건져내어, 마침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여호와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령이 임하던 날, 요엘서에 기록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욜 2:32)를 인용하면서 선언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여호와가 예수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같은 구절이 두 번 반복됩니다. "강한 손으로" 모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기여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강한 손이 일하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것을 "본다". 언약의 성취에는 인간의 능력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그 강한 손의 궁극적 표현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십자가, 그것이 강한 손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여기서 쓰인 히브리어 단어들은 하나하나가 신학적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
무거운 짐"(세발라)은 율법의 짐을, "노역"(아보다)은 인간의 행함을, "건지며"(나찰)는 누군가의 손에서 빼앗아 구한다는 것을, "빼내며"(야차)는 그 자리를 완전히 떠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전체를 한 단어로 요약한 것이 "속량"(가알), 값을 치르고 다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분이 무거운 짐을 거두시는 방법은 인간의 행함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짐 자체를 십자가에서 친히 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알지라"는 히브리어 '야다'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지적 인식이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남자와 여자가 하나 되는 것을 묘사할 때 쓰인 바로 그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과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기 전체가 향하는 목적지입니다. 애굽에서의 탈출은 수단이고, 여호와를 아는 것, 그분과 연합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러나 9절은 씁쓸하게 끝납니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고통에 짓눌린 사람에게 언약의 말씀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도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요 5:38). 말씀이 거하지 않는 곳에서는 아무리 좋은 소식도 뚫고 들어가지 못합니다.

낡은 집이 다 허물어진 날 밤, 집주인은 빈 터에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건축가는 그 밤에도 일하고 있었습니다. 새벽이 오고 날이 밝자, 집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집주인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보았을 뿐입니다.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이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강한 손으로 완성하시고, 우리는 그것을 보며, 마침내 그분을 알게 됩니다. 그 앎이 영생입니다. 그 앎이 출애굽의 목적이었고, 십자가의 목적이었으며, 지금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 주어진 초대입니다. "여호와인 줄 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