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편 46:10)
매일 아침, 출근 전 스마트폰을 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직장인 있습니다. 인스타그램에 어제 저녁 먹은 음식 사진을 올리고, 링크드인에 자신이 참여한 프로젝트의 성과를 정리해 게시했습니다. 좋아요 숫자를 확인하는 일이 어느새 그의 아침 의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을 알려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았습니다. 더 멋지게, 더 능력 있게, 더 행복하게 보여야 한다는 압박속에서 말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 대부분이 그렇듯, 그는 자기 홍보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오래된 수도원 피정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사흘간의 일정 중 가장 낯선 순서는 '고요의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기도라고 하면 무언가 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고, 그리고 말합니다. 감사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이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기도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쏟아놓아야 한다는 압박을 느낍니다. 말이 끝나야 기도가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민원 창구에 찾아가 서류를 제출하듯,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도 청원 목록을 읽어 내려갑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것은 사실 또 하나의 자기 홍보가 아닐까요. 나의 필요, 나의 소원, 나의 계획을 하나님께 보고하는 행위. 그 기도의 중심에는 결국 '나'가 있는 것입니다.
고요의 기도는 여기서 출발점 자체가 다릅니다. 그것은 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고,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으며, 그저 하나님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들립니다. 어쩌면 게으른 기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해보면, 침묵은 생각보다 훨씬 힘든 훈련임을 곧 알게 됩니다. 수도원 기도실은 작고 어두웠습니다. 그는 방석 위에 앉아 눈을 감았습니다. 지도 신부는 딱 하나만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처음 오 분은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이내 머릿속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처리 못한 업무 이메일이 떠올랐고, 어젯밤 아내와 나눈 사소한 말다툼이 재생되었고, 점심 메뉴가 무엇일지 생각이 흘러갔습니다. 침묵하려 할수록 머릿속은 더 요란해졌습니다. 말을 하지 않으니, 말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민낯입니다. 우리는 말 중독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말하고, 듣고, 읽고, 스크롤합니다. 침묵이 찾아오면 우리는 그것을 공허함으로 느끼고 본능적으로 무언가로 채우려 합니다. 스마트폰을 꺼내거나, 음악을 틀거나, 누군가에게 전화를 겁니다. 우리는 이미 침묵을 견디는 능력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습니다.
언어학자들은 인간이 하루 평균 약 1만 6천 단어를 말한다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말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진정으로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일까요. 대부분의 말은 습관이고 반사이고 소음입니다. 정작 영혼 깊은 곳의 언어,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그 무언가는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습니다. 고요의 기도가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말 이전의 언어, 영의 언어인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경험을 합니다. 오랜 친구와 카페에 마주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 침묵이 오히려 어떤 대화보다 깊은 교감이 되었던 순간이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있을 때, 말 한마디 없이도 모든 것이 전해지는 느낌 같은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이것을 이심전심이라 불렀습니다. 마음이 마음으로 직접 전해지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텔레파시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비주의적 개념이 아닙니다. 언어가 발달하기 이전, 인간에게는 더 섬세한 감각의 채널이 있었습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언어가 정교해질수록, 우리는 그 채널을 점점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치 걷지 않아 약해진 근육처럼, 영적 감응의 기능은 퇴화되어 갔습니다. 고요의 기도는 그 잃어버린 근육을 다시 깨우는 훈련입니다.
그가 기도실에서 삼십 분쯤 지났을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머릿속의 소음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생각이 떠오르면 잡지 않고, 강물 위의 나뭇잎처럼 그냥 흘려보냈습니다. 그러자 눈앞에, 아니 눈을 감은 어둠 안에, 깊고 고요한 검은 공간이 펼쳐지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어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둠이 점점 깊어지면서,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눈을 번쩍 떴습니다.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이 두려움은 고요의 기도를 처음 경험하는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 겪습니다. 자아가 희미해지는 느낌, 자신이 사라지는 것 같은 감각입니다. 우리는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으로 확인해왔기 때문에, 그것들이 멈추면 죽는 것 같은 공포를 느낍니다.
부흥회에서 간혹 일어나는 입신의 현상과 유사합니다. 바닥에 쓰러진 채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는 상태,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기이하고 무섭게 보이지만, 그것은 자아가 내려앉는 경험입니다. 자기가 사라진다는 것은 죽음의 은유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줄곧 이것을 요청해왔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죽어야 산다." 고요의 기도는 그 신학적 명제를 몸으로 체험하는 통로인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우주비행사들이 지구 밖으로 나갔을 때 마주치는 하늘은 파랗지 않습니다. 칠흑 같은 검정입니다. 우리가 매일 바라보는 파란 하늘은 대기가 만들어내는 산란의 결과일 뿐, 우주 본연의 색깔은 흑암입니다. 사방 어디를 봐도 오직 검은 고요만이 펼쳐집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은 첫째 날 만들어진 창조물이었습니다. 빛이 있기 이전, 하나님은 이미 계셨습니다. 성경은 그 상태를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묘사합니다. 고요의 기도가 접하게 하는 그 깊은 어둠은 악의 어둠이 아닙니다. 창조 이전의 하나님, 빛도 형상도 언어도 없었던 그 원초적 실재에 가닿는 통로입니다.
영어 성경이 어떤 구절을 'dark saying'이라 번역했듯, 그 흑암 속에는 형상 없는 말씀, 언어 너머의 계시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둠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을 마귀의 영역으로 단순화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둠의 권세는 실재합니다. 그러나 고요의 기도에서 만나는 흑암은 결이 다릅니다. 그것은 위협이 아니라 품음입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고요입니다. 텅 빈 것이 아니라 충만함입니다.
사흘째 되던 날, 그는 다시 기도실에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는 두려움이 찾아와도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왔을 때, 그는 저항하는 대신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자신이 작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안도감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무거운 짐을 지고 걷다가 마침내 내려놓은 것 같은, 그런 가벼움이었습니다. 형상도 없었고, 들리는 목소리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온몸으로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깊은 기쁨,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 언어로 포착되기 이전에 이미 전해진 무언가, 그것이 기도였습니다.
기다림과 침묵, 이 두 가지는 현대인에게 가장 낯선 덕목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더 빠르게, 더 크게, 더 많이를 향해 달려갑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증명하고 확장해야만 살아남는다고 배웠습니다. 그 구조 속에서 침묵은 낙오처럼 보이고, 기다림은 무능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를 이긴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자신을 내려놓을 때에만 기다릴 수 있고, 자신을 비울 때에만 침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침묵의 끝에서, 언어로는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을 온몸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말을 멈출 때, 비로소 들리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시편 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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