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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으로

탐심(에피뚜미아)에 대한 성경적 이해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6. 8.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로마서 7:7)

헬라어 에피뚜미아는 단순히 '
탐심'이라 번역되지만, 본래의 뜻은 ‘갈망, 욕구, 열망’입니다. 이 단어는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능적인 성향 혹은 자연스러운 ‘원함’까지 포함하는 중립적인 개념입니다. 따라서 에피뚜미아는 무조건 죄가 아니라, 그 욕구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위해 발현되는가에 따라 죄가 될 수도, 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숨 쉬듯 ‘
원하는’ 존재입니다. 더 좋고, 더 편하고, 더 의미 있는 것을 향해 끊임없이 갈망합니다. 성경은 이 갈망을 ‘에피뚜미아’라고 표현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욕심’ 혹은 ‘탐심’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사실 단순히 부정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생래적인 성향, 즉 존재의 본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호흡 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 에피뚜미아에 대해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율법이 오기 전까지는 그 갈망이 죄로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율법이 주어졌을 때, 인간은 즉시 그것을 ‘선과 악’,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나누고, 그 중에서 자기 유익에 맞는 것을 택하며 살아갑니다. 그때부터 그 자연스러운 에피뚜미아는 죄가 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동일한 단어가 예수님의 입에서도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 여기에서 ‘원하고 원하였다’는 말 역시 에피뚜미아입니다. 예수님도 갈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갈망은 자기 유익이나 안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찢어 유월절 어린양으로 제자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갈망이었습니다. 이는 본래 에피뚜미아가 악한 것이 아니라, 그 갈망을 이끄는 ‘마음의 구조’, 곧 한 마음인가 두 마음인가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의 후손으로,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두 마음’의 존재입니다. 본래 하나였던 마음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갈라졌고, 우리는 언제나
“무엇이 더 나에게 이익인가?”를 따지며 갈망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의 에피뚜미아는 죄로 작동합니다. 죄는 단지 어떤 행위가 아니라, 내 안의 분열된 마음이 율법을 자의적으로 재단하고 내 중심으로 해석하는 ‘태도’입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 깨닫습니다.
“나는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그 열심이 도리어 나를 죄로 이끌었다.” 율법은 죄가 아니라, 죄가 죄인 줄 알게 만드는 하나님의 거울입니다. 그 거울 앞에서 그는 자신의 정체를, ‘죄 아래 팔린 자’라는 존재의 진실을 처음으로 대면하게 됩니다. 율법은, 내가 누구인지 밝히기 위한 하나님의 학습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새 성전, 곧 말씀하시는 율법,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태어난 존재입니다. 더 이상 문자에 묶여 선악을 판단하며 자기 유익을 쫓는 자들이 아니라, 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새 피조물입니다. 진리를
‘체계와 차서’ 안에서 알아가며, 그 진리가 우리를 율법의 얽매임에서 해방시킨다는 것을 배웁니다.

예수께서 이루신 성전의 무너짐은, 바로 우리 안에서 두 마음이 무너지는 사건이며, 성령이 임한 새 성전에서 하나 된 마음으로 다시 서는 부활의 사건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질그릇처럼 쉽게 깨어질 수 있는 존재지만,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담긴 성전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갈망을 드러내는 당신의 마음은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우리 안에는 날마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갈망이 단지 물질적인 것이든, 인정이든, 의미이든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그 갈망 자체보다, 그것을 이끄는 마음이 하나냐, 둘이냐입니다.

하나의 마음으로 사는 이는 주님의 뜻 하나만을 따라 움직입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찢어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두 마음으로 사는 이는 언제나 자신을 보호하고, 판단하고, 유익을 따지며 움직입니다. 그리고는 그 갈망이 율법이라는 구조 속에서 자신의 죄성을 드러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어떤 존재인지 드러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선과 악을 나누고 그 중 하나를 택해 살아가는 자의 방식이 곧 죄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안의 에피뚜미아를 보십니다. 우리의 갈망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그 갈망의 방향이 곧 마음의 상태입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원하십니다. 단순한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율법을 말씀하시는 분으로 알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라고 부르십니다.

두 마음으로는 그리스도를 담을 수 없습니다. 두 마음으로는 그 갈망이 결국 자기를 위해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그 두 마음을 십자가에서 무너뜨리십시오. 당신의 갈망을 주께 내어드리십시오. 그리고 하나 된 마음으로, 진리를 따르십시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두 마음에서 하나의 마음으로, 자기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문자에 갇힌 신앙에서 살아있는 말씀과 함께 걷는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율법이 가르쳐준 죄는, 우리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 안에 다시 살게 하려는 은혜의 거울이었습니다.
이제 그 진리 안에서 당신의 갈망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거룩한 에피뚜미아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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