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23)
이 구절은 복음을 가장 간결하고도 강력하게 요약한 말씀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익숙하게 듣고 넘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 '사망', '영생'이라는 단어는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그 안에 담긴 복음의 무게를 놓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한 진리는, 우리가 흔히 아는 개념과는 너무나도 다릅니다.
“하나님이 죽으실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이 교회 게시판에 올라왔다고 합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의 사유 구조가 복음을 오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 중 하나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 우리가 이해하는 생명은 과연 성경이 말하는 그것과 같은 것일까요?
우리가 아는 '죽음'은 진짜 죽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을 더럽고, 무섭고, 피해야 할 재앙으로 여깁니다. 생명은 좋은 것이고,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 자체가 이미 인간의 선악체계에 기반한 판단입니다.
성경은 죽음을 단순한 생명의 종료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은 진리를 잃어버린 피조물의 상태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하나님의 모형이며, 동시에 진리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모든 존재는 영원히 존재합니다. 다만 그 영원이 ‘진리의 생명 안에 있는가’, 아니면 ‘진리에서 분리된 상태로 영원히 사는가’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죽음은 단지 끝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열리는 문일 수 있습니다. 역사라는 찰나를 지나 영원을 향해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완성된 자에게는 ‘임종(臨終)’입니다. 곧 ‘종(終)’이요, ‘완성’이요, ‘성취’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거부한 자에게는 그것이 ‘죽음(死)’이며, 진리와의 영원한 단절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초반에서 율법과 죽음을 결혼 관계로 설명합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여인은 그 법에 매여 있지만,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벗어난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한 결혼 법의 예가 아니라, 율법 아래에서 죽지 않으면 결코 자유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모형입니다.
우리는 본래 율법이라는 남편 아래에서 죄의 정욕에 이끌려 살던 존재였습니다. 그 결과는 ‘사망을 위하여 맺는 열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 참여한 자들은 이제 율법의 법적 구속력에서 해방된 자들입니다. 이제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영의 새로운 것’은 더 이상 억지로, 외형적으로, 눈가림식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발적이며 진리에서 비롯된 섬김입니다. 이 섬김은 의무가 아니라 은혜이며, 율법 아래서의 억눌림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죄와 사망의 정의를 다시 봐야 합니다. 바울은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는 도구이지, 죄 자체가 아닙니다. 율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죄를 죄로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탐내지 말라”는 율법이 없었더라면 ‘탐심’이라는 마음의 작동을 죄로 인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죄의 삯은 분명히 사망입니다. 그리고 그 사망은 단순히 육의 종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실존적 파멸을 의미합니다. 죄는 단지 잘못된 행동의 누적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진리의 목적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그래서 ‘하마르티아’, 과녁을 벗어남 이라는 말이 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은 단지 ‘끝’이 아니라, ‘진리에서 벗어난 존재의 완성된 형태’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생기(르와흐), 그 영의 호흡이 없다면, 인간은 진리를 떠난 ‘죽은 존재’로 남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 사망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로 만드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자리에 서셔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그와 함께 죽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단지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피해야 할 더럽고 무서운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케 하는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은 은혜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되고, 죄의 정욕에서 놓이게 되는 유일한 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망이 선물이다. 왜냐하면 그 사망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이 은혜의 죽음을 통과한 자만이, 이제는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로의 완성이며, 진리를 향한 문이며, 복음의 생명력 안에서 열리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당신은 ‘죽음’에 대해 세상이 말하는 방식으로 여전히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율법에서 자유로운 진리의 섬김이 당신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억눌림과 의무로서 신앙을 유지하려 하십니까?
당신은 진정으로 ‘죽음’을 통과한 사람입니까? 그러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살아 있으나 죽은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완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죽음을 지나 얻는 생명’, 그 은혜의 길을 오늘도 붙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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