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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

하나님나라 -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의 의미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10.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1953년, 에베레스트 정상 정복 소식이 전 세계에 타전되었습니다.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가이가 인류 최초로 그 정상에 섰습니다. 그 뒤로 수십 년간 수많은 산악인들이 같은 길을 올랐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통계가 있습니다. 에베레스트에서 사망한 등반가들의 상당수는 정상에 오른 후, 내려오다가 죽었습니다. 올라가는 데 모든 힘을 쏟아부은 탓이었습니다. 목표에 도달했을 때 이미 탈진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정상에 서는 것에만 집중했지, 그 이후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종교적 열심도 이와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도덕적 정상, 영적 정상에 오르기 위해 모든 힘을 쏟습니다. 그리고 그 정상에 서는 순간을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셨습니다.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는 것, 쌓는 것이 아니라 놓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은 흔히 "
그런즉"으로 시작하는 것으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원문의 뉘앙스는 훨씬 강한 역접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달라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이 "그러나" 앞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 앞 단락에서 이방인들의 삶을 묘사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사는 삶, 돈을 사랑하고, 보물을 땅에 쌓고, 내일을 두려워하며 사는 삶,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이 저 먼 이방인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교회 새벽기도에 나오면서도 무엇을 입고 갈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자리인데, 어느새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입니다. "
예의"라는 단어로 포장되지만, 그 안에는 나를 돋보이게 하고 싶은 본능이 살아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이 본능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나"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같은 말씀을 두 번 하셨습니다. 25절에서 한 번, 31절에서 또 한 번, "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반복하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그만큼 우리에게 깊이 박혀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앞에서 솔직해지십시오. 직장을 잃은 지 여섯 달이 된 사람에게, 통장 잔고가 바닥나가는 사람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이 가능합니까? 이를 악물고 결심하면 염려가 사라집니까? 한동안은 버텨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무너집니다. 우리가 집착하고 중독된 것들은 우리의 의지로 쉽게 떠나가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콜라를 끊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끊은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우리는 콜라 하나 마음대로 못 끊는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가 염려를, 탐심을, 두려움을 의지로 끊어낼 수 있겠습니까? 중독은 그것이 우리를 찾아와서 우리를 점령하고 살다가, 떠나고 싶을 때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감기가 내 의지로 낫지 않듯, 인간은 어떤 존재와 영역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그렇다면 산상수훈의 저 수많은 명령들은 왜 주어진 것입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밀라,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 이것이 이를 악물고 달성해야 할 과제표입니까? 아닙니다. 실망하라는 것입니다. 네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나에게로 오라는 초대인 것입니다. 산상수훈 5장, 6장, 7장이 죽 이어지다가 11장에 이르러 예수님이 결론을 내리십니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것이 구조입니다. 됩니까? 안 되지요? 그럼 내게로 오십시오.

19세기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불리는 찰스 스펄전은 사역 말년까지 담배를 끊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그의 결함으로 봅니다. 그러나 다른 시각이 있습니다. 스펄전은 자신의 연약함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 거룩해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반면 오늘날 교회의 간증 시간을 생각해보십시오. "
어느 집회에 갔다 온 후 술을 끊었습니다. 담배를 끊었습니다." 회중은 박수를 칩니다. 교회는 그것을 성화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낸 사람을 모범으로 세웁니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불면증으로 술에 의존하다 중독된 중년 남자였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복음이 담긴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
이게 예수 믿는 거라면 나도 진짜 한번 믿고 싶습니다." 그는 한 시간 반 거리를 걸어서 새벽 다섯 시 반 기도회에 수개월을 나왔습니다. 석 달간 술도 끊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인간은 집착과 중독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는 설교를 들은 후, 그는 다시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 같은 놈도 하나님이 참 사랑하신다 하네요. 복음이 뭔지 알 것 같습니다."

교회는 이 두 경우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술을 끊고 간증하는 사람에게는 박수를, 다시 술잔을 드는 사람에게는 "
의지도 없는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습니다. 그러나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술을 끊고 사람들 앞에 서서 인정받는 것과, "하나님이 끊게 해주시지 않으면 저는 안 됩니다"라고 고백하며 다시 한 잔을 드는 것, 어느 쪽이 더 하나님 앞에 정직합니까? 어느 쪽이 복음에 가까웁니까?

자기 의지로 중독을 끊어낸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포장하는 일, 그것이 사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또 다른 자기 자랑일 수 있습니다. 그 경우 중독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더 세련된 중독으로 갈아탄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라는 중독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하여 하나님께 내놓는 자들이 아닙니다. "
이 짐은 제가 질 수 없습니다"를 고백하며 예수께 드리는 자들입니다.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 말씀은 한 가지를 전제합니다. 우리가 지금 다른 나라를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 일합니다. 더 좋은 직함을 얻고, 더 넓은 집을 사고, 자녀를 더 좋은 학교에 보내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합니다. 이것이 나쁜 것입니까? 나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중심에 ""가 있습니다. 나라는 왕국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은 교회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어느 대형 교회 장로가 교회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교회 건물이 얼마나 크고, 성도가 몇 명이고, 사역이 얼마나 많은지, 그의 눈빛에는 자부심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 자부심의 대상이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그 교회의 일원인 자신입니까? 그것이 사활을 걸 만큼 중요한 것이라면, 그 신앙의 대상은 사실 교회라는 기관입니다. 그리고 그 기관 안에서 자신의 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침노해 들어온다는 말은 바로 이 나라 건설을 멈추라는 선언입니다. 내가 공들여 쌓아 올린 왕국에서 손을 놓으라는 것입니다.

"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의를 폐기하라"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의를 구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내가 남들보다 더 도덕적이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다." 종교는 이 욕구에 가장 그럴듯한 옷을 입혀줍니다. 간디는 산상수훈을 매일 읽었습니다. 진지하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삶에서 실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 말씀을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말씀이 그를 겸손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가 말씀을 소유했습니다. 예수님의 의는 이 인간의 의를 전부 폐기시킵니다. 내가 술을 끊고 담배를 끊고 선행을 베푸는 행위를 하나님 앞에 공로로 내놓는 것 자체를 하나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다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행위를 나의 의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이루어낸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오해받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그대로 두고 거기에 기독교를 덧붙입니다. 내 욕망, 내 가치관, 내 자아는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플러스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언제나 같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한 존재가 되고, 신앙은 나의 성공을 위한 도구가 됩니다. 절과 교회가 무엇이 다릅니까? 불상 대신 십자가를 걸어두었다고 본질이 달라집니까? 여전히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의 복을 위해 절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절입니다. 십자가를 배경으로 한 절일 뿐입니다.

기독교는 "
있음"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없음"에서 출발합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니, 가장 낮은 지옥에 들어가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자입니다." 이 바닥에서 출발해야 비로소 나를 위한 하나님이라는 우상이 깨집니다. 차등 있는 상급을 논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나는 이만큼 했으니 더 좋은 자리를 받아야 한다"는 계산이 그 안에 있습니다. 여전히 자기가 중심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부정당합니다. "넌 아니다. 넌 없음이야." 이것이 복음의 출발점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화가 납니다. 그 화남이 정상입니다. 내 안의 왕이 자기 왕좌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을 외쳤습니다. 그 개혁의 자리에 지금은 무엇이 들어서 있습니까? "오직 나"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깨지면 다시 쌓고, 무너지면 다시 세웁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개혁의 이름으로, 심지어 복음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선포될 때, 언제나 충돌이 일어납니다. 가인이 아벨을 미워했듯, 하나님의 것이 선포될 때 미움이 드러납니다. 목사가 전하는 하나님이 미워지고, 그것을 전하는 목사가 미워지는 것이 1단계입니다. 말씀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육신을 입고 자아에 갇혀있는 사람에게, 그 자아를 깨고 들어오는 말씀이 달콤하게 들릴 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 속에서도 계속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이것이 하나님이 구원하신 백성이 살아가는 길이구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합니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다 정상 직전에 돌아선 등반가가 있었습니다. 어니스트 섀클턴의 남극 탐험대원이기도 했던 어니스트 아담스는 정상이 코앞에 보이는 지점에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
더 이상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 그는 빈손으로 내려왔습니다. 정상을 밟지 못한 등반가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팀원들도 살려서 데려왔습니다.

신앙의 여정에도 이 순간이 옵니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지점, 내 의지도, 내 열심도, 내 도덕성도 모두 바닥난 자리, 아무것도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는 자리, 그 자리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가 은혜의 시작점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궁지로 모시는 것은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손을 놓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쥐고 있던 것들인 나의 의, 나의 성취, 나의 왕국을 하나 하나 놓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내미시는 손이 보입니다.

우리에게서 가끔 선한 행위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친절함, 예상치 못한 너그러움, 스스로도 놀라운 용서, 그것은 내가 성화된 증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서 사신다는 증거입니다. 거기서 상급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
하나님이 내 삶에 간섭하시는구나." 그 감사로 충분합니다.

"
더 이상 갈 데가 없네요." 이것이 복음의 문입니다. 이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의 결론입니다. 구하는 노력의 끝에 있는 것은 성취가 아니라 고백입니다. 내가 구할 수 없다는 고백, 내가 이룰 수 없다는 고백, 그 고백이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게 합니다. 소요리문답 첫 번째 문답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즐거워하는 것, 곧 누리는 것입니다.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내가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침노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의 의는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세상에 몰리는 날일 수 있습니다. 궁지에 몰리는 날일 수 있습니다. 그때 손을 놓으십시오. 내가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