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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

하나님나라 -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1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7:20~21)

1940년대, 유럽의 어느 기차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노인이 플랫폼에 서서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무원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
어느 기차를 기다리십니까?" 노인은 대답했습니다. "내가 탈 기차입니다." 역무원이 다시 물었습니다.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노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습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입니다." 우문현답처럼 들리지만, 이 노인의 대답은 사실 가장 정직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지도 위의 좌표로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 임하나이까?" 이 질문 안에는 뜨거운 열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군화 아래 짓밟힌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력한 메시아가 나타나 적을 물리치고, 다윗의 왕좌를 회복하고, 열방이 예루살렘 앞에 무릎 꿇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나라, 지도 위에 표시할 수 있는 나라, 군사력과 정치력으로 측정할 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 기대를 정면으로 뒤집었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2천 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여전히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질문을 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1517년 10월,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 조항을 못 박은 마르틴 루터는 그 순간까지 로마 가톨릭 사제였습니다. 그는 교황의 권위 아래 서약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사였고,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였습니다. 개혁은 교회 밖에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패한 교회 한가운데서, 로마서를 강의하던 한 수도사가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 앞에서 무너진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칼뱅도, 츠빙글리도, 낙스도 모두 로마 가톨릭 안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
올바른 교단'의 울타리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가장 혼탁한 제도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이 숨겨 두신 곳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역사가 반복해서 증언하는 진실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넘기셨을 때도, 포로의 땅 그 한복판에 다니엘이 있었고 에스겔이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탄식할 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자리에,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울타리로 묶어 놓은 가시적 집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의해,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형성된 무리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제도적 교회의 경계선이 참된 하나님 나라의 경계선과 일치한다는 보장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 가룟 유다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익숙하게 알고 있어서, 그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인지를 잊어버립니다. 유다는 열심당원이었습니다. 열심당은 로마에 맞서 폭력적 저항도 불사한 민족주의 독립운동 세력이었습니다. 유다는 전부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의 눈에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혁명가였을 것입니다. 그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것은 가짜 헌신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뜨렸을 때, 유다가 분노하며 말했습니다. "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고 왜 허비하느냐." 얼마나 그럴듯한 말입니까? 효율, 복지, 약자에 대한 배려, 그의 논리는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가 없어 보였습니다. 아무도, 심지어 다른 제자들도, 그가 멸망의 자식인 줄 몰랐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우리도 몰랐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유다 편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 가운데 반드시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하십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구별할 수 없도록 말입니다. 이것이 불안하게 느껴진다면, 그 불안 자체가 우리가 여전히 '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하나님 나라는 "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우리가 포착할 수 없습니다. 혼탁하고 가짜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다 그렇지 뭐,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거지"라고 고백하는 이들이 군데군데 심어져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난 이유를 우리는 흔히 '
불순종'이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 불순종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봐야 합니다. 그들이 먹은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였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창조 후 "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선언하실 때, 그것은 단순한 감탄사가 아닙니다. '좋았더라'의 히브리어 '토브'는 '선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심판의 선언입니다. "이것은 선하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최종 선언 이후에야 안식이 임합니다. 심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심판자의 자리를 빼앗으려 합니다.

어느 법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판사가 피고인에게 판결을 내리려는 순간, 방청석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습니다. "
저 사람은 내가 알기론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법정은 순간 술렁였습니다. 판사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 법정에서 판단하는 권한은 당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방청석에 앉아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칩니다. "
저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저 사람은 죄인입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습니다!" 아벨과 가인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 아벨이 형에게 맞아 죽을 때, 하나님은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살인자 가인이 유리하며 방황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표를 주어 아무도 죽이지 못하게 보호하셨습니다. 우리의 공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보호하신다"는 우리의 도식이 처음부터 성경의 도식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을 보호하고 보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누구이신가를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은 그 드러내심의 그릇입니다. 그 그릇이 의인이냐 죄인이냐, 착하냐 나쁘냐는 하나님의 목적과 무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19세기 영국 맨체스터의 방직 공장에서 일하던 한 직공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 열네 시간 씩 기계 앞에 서서 실을 감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그 일을 하는 기계가 도입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
나는 이제 쓸모가 없어." 산업혁명은 인간의 가치를 '생산성'으로 환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일하느냐,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가 그 사람의 가치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수단이 되어버린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세상 안에서 인간은 견딜 수 없는 분열을 경험합니다. '나는 수단인가, 목적인가.'

이 분열을 해소하기 위해 인간은 종교로 옵니다. 신 앞에서만큼은 목적 있는 존재,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말씀을 지키려 애씁니다. 헌신하고, 봉사하고, 기도하고, 금식합니다. 그 모든 수고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소망이 있습니다. "
하나님, 저 좀 봐주세요. 저는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지키는 삶은 인간의 노력으로 도달하는 목적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삶입니다. 성령이 독려하시는 그 과정에서 성도가 진정으로 배우는 것은 하나입니다. "
나는 왜 이것을 지킬 수 없는가." 이 자각이 은혜의 출발점입니다. 환경을 정화한다고 인간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술집을 없애고 인터넷의 유해 콘텐츠를 차단한다고 인간의 죄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알코올이 든 몸이나 안 든 몸이나, 들킨 자나 안 들킨 자나, 모두 똑같은 죄인입니다. 우리가 '성숙하다'고 부르는 사람은 대부분 들키지 않는 기술을 터득한 사람일 뿐입니다.

이것은 목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목사는 착하고 성숙하기 때문에 강단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늘도 세우시기 때문에 서는 것입니다. 진정한 설교자는 매번 강단에 오를 때마다 이 고백을 품고 올라옵니다. "
하나님이 손 놓으시면 나는 오늘로 끝이다." 성도의 하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하나님이 오늘도 붙드시기 때문에 내가 서 있다"는 고백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사사기 5장 드보라의 노래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 장군 시스라의 철 병거 구백 대를 무너뜨린 뒤, 드보라는 찬양을 부릅니다. 그런데 그 찬양 안에 드보라 자신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 하나님이 치신 자들, 하나님이 세우신 자들을 노래할 뿐입니다.

찬양은 내가 훌륭한 자임을 확인할 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자임을 깨달을 때, 어쩌지 못하는 힘에 의해 터져 나오는 것이 찬양입니다. "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자가 어떻게 은혜를 찬양하겠습니까?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자신이 어느 정도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은혜는 감격이 아니라 당연한 보상이 될 뿐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이 말이 충격적으로 들린다면,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깊이 인본주의의 언어로 신앙을 이해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기 위해 쓰이는 그릇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릇은 자신이 무엇을 담을지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릇은 도공의 손에 의해 빚어지고, 도공이 원하는 것을 담습니다. 그 그릇이 화려한 연회에 쓰일 수도 있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더러운 것을 담는 데 쓰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릇의 용도가 아니라 도공의 뜻입니다.

진짜 눈물은 연출되지 않습니다. 예배당에서 음악이 흐르고 조명이 어두워질 때 흘리는 눈물, 남들이 보기 때문에 손을 들고 기도하는 모습, 자신이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았는지를 증언하는 간증, 이런 것들이 가짜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형식이 될 때, 경건의 모양이 되어버릴 때,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향한 것이 됩니다.

진짜 눈물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직면할 때 터집니다. 꾸밀 수 없고, 숨길 수 없고, 변명할 수 없이, 하나님 앞에 그냥 까발려질 때. "
나는 하나님이 오늘이라도 손 놓으시면 지옥으로 떨어져야 할 자다. 언제 버리셔도 아무 할 말 없는 자다." 이 실체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어떤 형식도 필요 없이 그냥 손이 올라갑니다. 내 손 잡아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공식으로 포착되지 않습니다. "
성도는 이래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저래야 한다"는 우리의 도식 안에 하나님은 갇히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혼탁하고 가짜가 가득한 이 세상 한가운데서, 당신의 백성을 하나님이 붙드시고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만 확인하십시오. "
나는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진짜로 자각하고 있습니까?" 이 자각 안에 머무는 자가 성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포착되지 않게, 그러나 분명하게 존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