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4~15)
1945년 8월, 태평양 전쟁이 끝났습니다.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했고, 세계는 종전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필리핀 루방 섬 깊은 정글 속에서 홀로 싸움을 계속한 일본군 병사가 있었습니다. 히로 오노다입니다. 그는 무려 29년 동안 전쟁이 끝난 줄 모르고 게릴라전을 이어갔습니다. 전단지가 뿌려져도 적의 선전이라 여겼고, 신문이 들어와도 조작된 것이라 의심했습니다. 1974년, 그의 옛 상관이 직접 정글로 찾아와 명령을 철회하기 전까지, 오노다는 이미 끝난 전쟁을 위해 29년을 싸웠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바로 이 소식이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전쟁은 이미 끝났습니다. 하나님이 이기셨습니다. 그 완료된 승리의 소식이 우리에게 선포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오노다처럼 아직도 정글 속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끝난 전쟁을, 이미 결판난 싸움을, 마치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믿으며 말입니다.
우리는 오래도록 천국을 잘못 상상해왔습니다. 죽으면 영혼이 몸을 떠나 어딘가 아름다운 곳으로 올라간다는 그림입니다. 흰 구름 위에 황금 대문이 있고, 그 안에서 영원히 편안하게 쉬는 곳 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성경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플라톤에게서 왔습니다. 플라톤은 인간을 둘로 나눴습니다. 고귀한 영혼과 열등한 육체입니다. 참된 세계는 영혼의 세계이고, 물질 세계는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이 철학이 초대 교회 시대에 기독교 신앙 안으로 스며들었고, 사람들은 구원을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어서 이 고단한 몸을 벗고 영혼만 남아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천국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흙으로 몸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나는 영혼만이 아닙니다. 이 손도, 이 발도, 이 늙어가는 얼굴도 나입니다. 하나님은 그 온전한 나를 아십니다. 그리고 그 온전한 나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실레이아는 장소가 아니라 통치를 뜻합니다. 왕이 다스리는 곳이 왕국인 것처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이 사람에게, 지금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죽은 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나라가 임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울까요? 답은 단순합니다. 인간은 이미 자기가 왕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집에 두 왕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오시려 할 때, 이미 그 자리에 앉아있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나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느낍니다. 내 배고픔이 가장 급하고, 내 고통이 가장 크고, 내 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이 죄의 구조입니다. 신학적 언어로는 자기 신격화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본능이 종교 안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종교는 이 본능에 가장 세련된 옷을 입혀줍니다.
기도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내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으로 대합니까? 헌금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자주 내가 드린 것에 비례하는 축복을 기대합니까? 전도를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자주 내가 몇 명을 전도했다는 성취감을 추구합니까?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있습니다. 나의 소원, 나의 성취, 나의 안전, 나의 의로움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율법의 613개 조항을 외우고 지키며, 아침마다 기도하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습니다. 그들의 열심은 진짜였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의 중심에는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나"가 있었습ㄴㄱ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목사 로버트 슐러는 캘리포니아에 크리스탈 교회를 세웠습니다. 수정처럼 빛나는 유리 건물, TV로 전국에 송출되는 예배, 수만 명의 성도, 그는 강단에서 선포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십시오. 헌금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함께 이루어 나갑시다." 성도들은 감동했고 헌금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국 파산에 직면했고, 건물은 경매에 넘어갔습니다.
이것은 한 교회의 실패담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도우려 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창조주의 계시는 이것입니다. "나는 너희 도움을 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너희가 내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다." 이것을 뒤집어 인간이 하나님을 돕는다고 나서는 순간, 우리는 다시 왕좌에 앉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업 파트너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반대 방향에서 옵니다.
복음, 유앙겔리온은 원래 전쟁터에서 사용하던 단어였습니다. 승전보는 싸움이 끝난 후 승리를 알리는 전령이 달려오며 외치는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완료된 사건을 알리는 행위였습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이 작정하신 구원의 경륜이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이 소식을 듣는 것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소식은 계시로 온다는 것입니다. 계시란 감추어진 것을 당신이 택한 자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오셔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이민자 교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미국에 온 지 20년이 지나도록 영어 한 마디 제대로 못했습니다. 한인 마트에서 사고, 한인 교회에 다니고, 한인 TV를 보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의 딸이 학교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아버지는 딸이 살고 있는 세계를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딸이 통역해주었습니다. 선생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상장에 무슨 글이 적혀있는지, 그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딸의 세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자기가 찾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딸이 데려다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그러합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열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때가 찼고", 이 짧은 말 속에 무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때가 있습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도 그 때를 앞당기거나 늦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보내신 이가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여십니다. 우리가 준비되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합당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동시에 우리를 가장 깊이 해방시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출애굽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 뒤에는 이집트 군대, 앞에는 갈라지지 않는 바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은 "가만히 있어라"였습니다. 싸우라가 아니었습니다. 더 열심히 기도하라가 아니었습니다. 더 많은 헌금을 드리라가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있어라였습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늙어서는 남이 네 띠를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것은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선언이었습니다.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끌고 가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영광이 될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이 항상 옳지는 않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원하는 방향은 언제나 내가 왕이 되는 방향입니다. 하나님은 그 방향을 바꾸십니다.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십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성도의 고난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 일차적 목적은 나는 신이 아니구나 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의 선의가 있고, 어느 정도의 도덕성이 있고, 어느 정도는 남을 위할 줄 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상황을 조금 바꾸십니다. 직장을 잃게 하십니다. 건강을 가져가십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가 무너지게 하십니다. 그 순간 그 안에 있던 것들이 나옵니다. 분노, 원망, 시기, 두려움, 이기심,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그 자리가 은혜의 시작점입니다.
예수님은 들풀 한 포기가 솔로몬의 온 영광보다 아름답다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인간이 쌓아 올릴 수 있는 영광의 정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들풀은 하나님이 입히신 것입니다. 인간의 영광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들풀의 영광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평생 쌓아 올리는 것들인 명예, 재산, 평판, 성취는 솔로몬의 영광과 같습니다.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쌓는 것에서 손을 놓게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입히시기 시작합니다.
믿음은 노력이 아닙니다. 선물입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과학이 증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원자는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로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수식으로만 표현됩니다. 수식은 문자입니다. 말씀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이 세계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존재의 근원을 모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해가 되어야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포착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침략"이라는 책의 추천사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해도를 들고 부두에 앉아 저 바다를 어떻게 건널까 계산하고 있다. 바다로 뛰어들어 수심을 측량하라. 그래야 갈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수 있다." 하나님이 던져주신 지도는 복음입니다. 66권의 성경이 복잡해 보여도, 그 핵심은 하나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역설적이지만 복음을 받으려면 내려가야 합니다. 가득 찬 컵에는 아무것도 부을 수 없습니다. 내가 왕이라는 확신으로 꽉 찬 자리에 하나님 나라는 임하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자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 나는 신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자리, 거기서 십자가가 붙들립니다.
"예수 믿지 마세요, 기도하지 마세요." 역설적으로 이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네가 지금 믿고 있는 그 하나님, 네가 지금 기도하고 있는 그 방식, 네가 지금 섬기는 그 종교가 사실은 너 자신을 섬기는 것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버림받아 마땅한 자구나"가 느껴질 때, 처음으로 은혜를 받을 자리가 생깁니다. 종교 행위로 이루려 했던 내 소원과 야망이 헛수고였음을 알게 될 때, 무기력해집니다. 그 무기력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 무기력이 은혜가 들어오는 문입니다.
소요리문답 첫 번째 문답은 이렇게 묻습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뚫고 들어오셔서 계시로, 선물로,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려지지 않는 내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이 몸을 바꾸어 주셔야겠습니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진짜 기도의 시작입니다.
가다 보면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이 옵니다. 그날 하나님이 내미시는 손이 있습니다. 그 손을 기쁨으로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억만금을 모았어도, 세상의 큰 명예를 얻었어도, 그 손을 반갑게 잡지 못한다면 그것이 끝입니다.
오노다가 29년 만에 정글에서 나왔을 때, 그는 처음으로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29년 동안 지킨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이미 결판난 싸움을 혼자 싸운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말합니다. 전쟁은 이미 끝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이기셨습니다. 지금 당신이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그 왕좌에서 내려오십시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서십시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때가 찼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왔습니다. 누리면 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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