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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6. 3.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린도전서 4:14~20)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스스로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다고 착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반면 사도인 자신과 동역자들은 “세상의 찌끼”처럼 배고프고, 헐벗고, 모욕당하고, 박해당하고, 비방당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적으로는 무능해 보이는 삶인데,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삶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아 세상의 가치에서 끌어내려지는 삶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진짜 능력은 '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방언, 예언, 병 고침, 지식 등 눈에 보이는 은사를 '능력'이라고 생각했지만, 바울은 정반대의 개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은 교리, 웅변, 철학, 화려한 설교, 겉치레 종교생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능력’은 십자가를 지는 복음의 실재성, 곧 죄가 폭로되고, 사람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앞에 항복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만물의 찌끼가 되는 능력”, 이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내가 나를 그렇게 낮출 수는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능력이 없으면 가짜인가요? 로이드 존스 목사의 말씀처럼
"능력이 없으면 가짜야" 라는 말은 단순히 "니가 착하게 안 살면 가짜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바꾸어야 합니다. “자기의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복음 없이 자기를 덮고, 말만 화려하게 하며, 십자가 없이 종교 생활을 하는 자는 가짜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그 능력이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도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고, 자기 의와 종교로 위장하고, 내 죄를 폭로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 가짜인가요? 이 물음은 매우 정직하고 참된 질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복음이 비로소 선포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짜입니다.” 하지만 그 가짜를 진짜로 바꾸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우리 안의 죄를 숨기지 않고, 복음 앞에 무릎 꿇고 찢기고, 낮아지고, 찌끼처럼 밀려 내려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기꺼이 받는 자에게서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그 능력은 “사람을 부끄럽게 하지 않고, 오히려 죄인을 회개케 하고, 죽은 자를 살리며, 성도를 깨어 있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능력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깨뜨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이 말씀은 “말 대신 행동하라”는 윤리적 교훈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너 자신이 복음 앞에서 찢기고 깨어져야 한다”는 복음의 외침입니다. 그리고 그 깨어짐이야말로,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흔히 ‘
능력’이라 하면 뭔가를 성취하고, 해내고, 뛰어난 결과를 만들어내는 힘을 떠올립니다. 교회 안에서도 비슷합니다. 사람들이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큰일을 도모하는 모습을 보며 능력 있다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도 그랬습니다. 각종 은사들이 활발히 나타났고, 거기에서 우열을 가리려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뜻밖의 메시지를 던집니다.“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우리는 이 말씀을 단순히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줘라”는 식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진짜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 행동은 도대체 무엇을 향한 것이냐?”,“그 능력은 과연 누구로부터 오는 것이냐?” 바울은 이어지는 본문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4:13)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얼마나 아래로 끌어내렸는지 고백합니다. 세상에서 비천하게 여겨지는 자리, 손수 노동을 하며, 모욕을 받고, 박해를 당하며, 비방을 감수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안에 있다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참된 능력은 위로 솟구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낮아지는 데에 있습니다. 참된 능력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데에 있습니다. 참된 능력은 나를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이는 데에 있습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십자가에서 드러납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은 죄인을 끝까지 드러내고 폭로하여, 그를 복음 앞에 철저히 무너뜨리고, 그 위에 새 생명을 일으키는 능력입니다. 그 과정은 철저히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고, 때로는 침묵 가운데 일어납니다.

고린도 교회는 많은 것을
“행하고" 있었지만, 죄를 직면하지 않았습니다. 회개는 없고, 자랑만 있었습니다. 계모와 음행하는 자가 교회 안에 있었지만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능력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외형과 은사를 방패삼아, 복음이 덮어야 할 죄를 스스로 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그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을 알아보겠으나,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라.”(4:19) 여기서 바울이 보려는 능력은 기적이 아닙니다. 율법적 행위도 아닙니다. 그가 보려는 것은,“복음이 너희 안에 실제로 박혀 있는가?”, “너희가 찌꺼기처럼 낮아져도, 그리스도를 따르는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 됨을 고백하며, 회개의 길을 걷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인간의 자랑을 무너뜨립니다. 복음의 능력은, 죄를 덮는 것이 아니라 드러냅니다. 복음의 능력은, 인간의 열심을 깨뜨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묶어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고린도 교회처럼 많은 활동을 자랑합니다. 건물, 예배, 사역, 프로그램, 은사, 체험... 그러나 그 안에서 죄가 정직하게 고백되고 있습니까? 찌꺼기로 밀려 내려가는 성도의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까? 복음은 우리를 들쑤셔 깨뜨리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깨짐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증거입니다.

혹시 우리는 말과 활동으로 자기를 포장하면서, 복음이 내 안에 깊이 찔러 들어오는 걸 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우리는 교회 안에서의 열심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가리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는 종교인을 찔러 죽이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능력은 내 안에서 터져나오는 무언가가 아니라, 내 안에서 부서지는 그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