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히브리서 11:22)
애굽의 궁정, 임종을 앞둔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셉입니다. 노예로 팔려 왔으나 총리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 온 나라의 곳간을 손에 쥐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형제들과 그 자손들은 요셉 한 사람 덕분에 애굽에서 가장 기름진 땅, 고센을 얻어 풍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부러워할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둔 요셉은 뜻밖의 말을 남깁니다. "너희는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죽거든, 내 뼈를 여기 묻지 말고 가나안으로 메고 올라가라." 주변 사람들은 아마 의아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이토록 잘살고 있는데, 왜 다시 그 척박한 가나안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까? 기근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해 온 것이 불과 얼마 전인데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장면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습니다. 이 문장의 주어는 요셉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요셉이 원래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말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은 자기 손에 쥔 권력과 풍요를 스스로 내려놓지 않습니다. 집안에 성공한 사람이 하나 있으면 온 가족이 그 그늘 아래서 안정을 누리려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요셉이 만약 순전히 자기 마음으로 결정했다면, 아마 그는 형제들에게 "여기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요셉의 그 마지막 명령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계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그의 삶에 개입하여 만들어낸 결단이었습니다.
창세기 50장의 마지막 장면과 출애굽기 2장의 첫 장면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이 흐릅니다. 창세기 50장의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왕족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장에 이르면, 이 백성은 고된 노역에 신음하며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를 구하여 주소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성경은 그 사이에 하나님이 친히 애굽의 왕조를 바꾸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우연한 정치적 변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개입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출애굽기 2장은 이렇게 밝힙니다. "하나님이 그 언약을 기억하사", 곧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셨다는 것입니다. 풀어보면 이런 그림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가 부르짖게 된 것은 그들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오래전 한 사람,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그들의 삶 전체를 이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조상이라는 이름표 이상의 역할을 합니다. 창세기 14장에서 그는 318명의 사병을 이끌고 나가 조카 롯을 구해옵니다. 이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앞에서는 그 성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이 모든 장면은, 훗날 에베소서 1장이 말하는 창세전 언약, 아버지와 아들 되신 그리스도의 중보 언약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 언약 때문에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이 세상 역사 속으로 들어와 무언가를 배우고 떠나야 하는 존재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잠시, 조금은 낯선 비유를 하나 소개합니다. 18세기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시간이 곧 돈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 짧은 문장 안에는 근대 이후 인간이 살아온 방식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돈이란 결국 인간의 가치를 셈할 수 있게 축소해 놓은 도구이며, 사람들은 그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쏟아붓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 돈이 자신의 생존을 더 풍요롭고 길게, 궁극적으로는 영원히 지속시켜 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 개봉했던 SF 영화 〈인 타임〉은 이 발상을 극단적으로 형상화합니다. 영화 속 세계에서 사람들은 스물다섯 살이 되면 신체 노화가 멈춥니다. 대신 팔뚝에 남은 수명을 표시하는 시계가 새겨지고, 그때부터 모든 것이 '시간'으로 거래됩니다. 커피 한 잔에 몇 분, 자동차 한 대에 몇 개월, 집 한 채에 몇 년, 사람들은 시간을 벌기 위해 밤낮없이 일합니다. 잠을 자는 순간에도 시계는 줄어들기 때문에, 그들은 잠조차 편히 자지 못하고 끝없이 달립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예리하게 짚어내는 지점은, 이렇게 대다수가 필사적으로 일해 만들어낸 시간을 소수의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서 축적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비단 영화 속 상상만은 아닙니다. 에덴동산 이후 인류 역사 전체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림이었는지 모릅니다. 인간은 스스로 영생에 이르기 위해, 스스로 구원을 얻기 위해 시간이라는 이름의 생명을 쥐어짜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시간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인간에게 생명처럼 여기게 하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소개할 때 늘 나이부터 말합니다. "저는 몇 살입니다." 나이, 곧 시간의 축적량이 곧 나의 생명의 척도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간 쌓기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 역사 전체를 손에 쥐었다 해도, 그 역사가 종말을 맞는 순간 모든 것은 흩어집니다. 전도서의 기자가 "헛되고 헛되다"고 되뇐 것은 바로 이 허무의 정체를 꿰뚫어 본 고백이었습니다.
이 허무를 배우기 위해서는, 이 세상 속에서 한 번쯤 지옥과도 같은 시간을 통과해야 합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의 생애가 그 실례를 보여줍니다. 젊은 시절의 야곱은 누구보다 영리하고 계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삼촌 라반의 양떼를 치면서 나뭇가지의 껍질을 벗겨 물통에 담그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자신의 재산을 불려나갔습니다. 자신의 힘과 지혜로 형통을 쟁취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던 밤, 그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납니다. 이후 그는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사람이 됩니다.
그때부터 야곱의 삶은 완전히 다른 결로 흘러갑니다. 정착하려는 곳마다 블레셋 사람들이 찾아와 우물을 막았습니다. 당시 우물은 곧 생명줄이었으니, 이는 삶의 기반을 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세겜 땅에서는 외동딸 디나가 욕을 당하는 비극을 겪었고, 그 보복으로 아들들이 세겜 사람들을 학살하는 참극까지 벌어졌습니다. 훗날 야곱은 애굽의 바로 왕 앞에서 자신의 생애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내 나그넷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 나의 연조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넷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애굽에 들어와서는 아들 요셉 덕분에 편안한 노년을 보냈지만, 그 속에서도 믿음이 그의 마음을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앞둔 야곱은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두 손을 엇갈려 손자들을 축복합니다. 훗날 사람들이 이 장면에서 십자가의 형상을 읽어낸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당부합니다. "내 해골은 가나안으로 가져가라.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했지만, 다시 죄에 빠지고 나라는 둘로 갈라집니다. 결국 유다 왕국은 바벨론의 침공을 받고,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허수아비처럼 왕좌에 앉혀집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이 사건을 독수리 비유로 설명합니다(에스겔 17장). 바벨론이라는 독수리가 유다와 언약을 맺어 속국으로 삼으려 했으나, 유다는 도리어 자신에게 아무 은혜도 베풀지 않은 또 다른 독수리, 곧 애굽에 원군을 청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유다의 이 선택이 단순한 외교적 실책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언약 위반으로 규정된다는 점입니다. 왜일까요? 유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위기를 벗어나 보려 했던 것인데, 이것이 죄가 된 이유는 그것이 곧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고백을 회피하려는 시도였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패턴의 반복입니다. 광야에서도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아우성쳤습니다. 하나님이 나가라고 명하신 그곳으로 자꾸만 돌아가려는 것,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시드기야도 결국 애굽에 손을 내밀었다가 왕국의 종말을 맞습니다.
그러나 이 무너지는 역사 한가운데서 성경은 뜻밖의 소망을 발견해냅니다. 에스겔은 그 폐허 위에서 "연한 순" 하나가 꺾여 심긴다고 말합니다. 훗날 예수님이 겨자씨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그 순이 자라 큰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참된 왕,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표입니다.
에스겔 18장에는 당시 유다 사람들이 즐겨 쓰던 속담 하나가 등장합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어찌 아들의 이가 시다 하겠느냐." 조상의 죄를 후손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항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속담을 뒤집으십니다. 각 사람은 자기 죄로 심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이 본문에서 또 하나의 결을 읽어냅니다. 각자가 자기 죄값을 치러야 마땅한 이 구조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신 포도를 씹고 이가 시린 고통을 당하셨기에 우리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뒤이어 나오는 19장의 애가는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자기 죄의 무게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슬퍼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서는 36장과 37장에서 이 이야기의 결말을 보여줍니다.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 완전히 죽어 형체만 남은 그곳에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넣어지자 뼈들이 살아납니다. 이 '생기'라는 단어는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와 같은 단어입니다. 완전히 마른 뼈가 되는 것, 이 세상의 모든 자기 힘과 자랑을 내려놓고 해골이 되는 것, 그 자리에 하나님의 생기가 임할 때, 비로소 새로운 창조가 일어납니다.
신약으로 넘어가면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이야기가 있습니다. 흔히 이 본문은 "경건하게 살았던 이방인 고넬료가 그 경건함으로 구원받은 이야기"로 오해되곤 합니다. 그러나 찬찬히 읽어보면 이 사건의 진짜 초점은 고넬료가 아니라 베드로에게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구원받은 사도였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유대인 중심의 사고, 곧 이방인은 부정하며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편견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 고넬료를 사용하십니다. 고넬료를 만나기 전, 베드로에게는 하늘에서 각종 부정한 짐승이 담긴 보자기가 세 번이나 내려오는 환상이 주어집니다. "일어나 잡아먹으라"는 음성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이 세 번 반복됩니다.
왜 하필 세 번이었을까요? 베드로는 일찍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자기 안위와 명예를 지키려는 그 집요한 습성이, 구원받은 이후에도 형태를 바꾸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뿌리 깊은 습성을 다시 한번 다루십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명확합니다. 구원은 사람의 경건함이나 혈통, 자격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부정한 것을 부정한 채로 살려내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쯤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대목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헌신의 삶을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마을에 들어가 자기 인생을 온전히 내려놓고, 홀로 사는 노인들을 돌보며, 사기를 당하지 않도록 살피고, 낡은 집의 페인트칠까지 손수 해주는 사람들, 예수를 믿지 않으면서도 그런 삶을 사는 이들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런 삶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삶의 모습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지를 세상에 비추어 보여주는 한 조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더 직시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인간이 이루어내는 선한 일조차, 결국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기 가치를 확인받으려는 마음과 뒤섞여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산다"는 그 구별 짓기 자체가 또 하나의 자기 확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다라야 할 자리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만약 교회가 사람을 변화시키고 성숙시키는 것 자체를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방향을 잃은 것입니다. 그런 변화와 성숙은 결과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처럼, 자기 인생 없이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가 순진무구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인생의 결정권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이사를 가자고 하면 이사를 가야 하고, 먹으라 하면 먹어야 합니다. 좋고 싫음을 따질 처지가 아닙니다. 성도의 삶도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 이 말씀의 요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 자신에 대해 죽은 존재이기에, 더 이상 스스로 책임지고 결정할 인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진리는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을 통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제자 베드로는 자신 있게 말했다. "주여, 내가 주를 위하여 죽으리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히려 극심한 고뇌 가운데 땀이 핏방울처럼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왜 하필 이 순간, 이렇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셨을까요?
여러 신학자들은 이 장면을, 십자가라는 것이 인간의 결심만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무게임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네 힘으로 나를 위해 죽겠다고? 아니다. 나 자신도 지금 이렇게 고통 가운데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있다." 결국 예수님의 기도는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로 끝납니다. 이것이 우리의 진짜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싶은 마음이 절로 우러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기를" 구하면서도, 결국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그 씨름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파리의 로댕 미술관에는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유명한 조각상이 있습니다. 근육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듯 정교하게 조각된 이 작품은, 본래 지옥문 위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인물로 구상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세상에서 자기 몸과 정신을 극진히 관리하며 성실하게 살아낸 한 사람이, 마지막 순간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토록 성실하게 살았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이 형상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그토록 애써 쌓아온 것들, 세상의 기준으로 성실하고 선하다고 인정받는 삶의 모든 옷가지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벗겨질 것입니다. 창세기 6장은 인간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비가 내리는 날, 농부는 풍작을 기대하고, 뱃사람은 출항을 걱정하고, 풍력발전소를 가진 이는 이익을 계산합니다. 각자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것, 그것이 죄의 본질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스스로 되려는 것이 에덴동산에서 뱀이 심어놓은 최초의 유혹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놋뱀처럼 매달려 죽으셔야 했습니다(민수기 21장, 요한복음 3장). 죄 아래 있는 우리의 실체를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우리에게 새 옷을 입혀줍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화려하게 살았든, 야곱이 지팡이 하나로 험악한 나그넷길을 걸었든, 이들의 생애는 결국 같은 곳으로 수렴합니다.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값을 치르고 산 막벨라 굴, 그 한 무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각자 다른 삶의 자리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그 나그네의 무덤으로 함께 들어간다. 히브리서 기자가 요셉의 마지막 명령을 "믿음"이라는 단어로 요약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셉은 스스로의 판단으로 그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이 그의 삶에 들어와, 그를 왕좌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해골로, 나그네의 무덤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성도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가 처한 삶의 자리는 다를지라도, 믿음이 우리 안에 진정으로 자리 잡았다면, 그 믿음은 결국 우리를 자기 왕 됨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요셉처럼, 야곱처럼, 결국 낮아지고 낮아져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자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의 실체입니다.
'히브리서 말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히브리서 - 지팡이 하나, 야곱의 마지막 예배 (0) | 2026.08.14 |
|---|---|
| 히브리서 - 심장에 꽂힌 칼, 모리아산에서 만난 은혜 (1) | 2026.08.04 |
| 이미 도착한 사람처럼 살기 - 나그네 된 자들의 이야기 (1) | 2026.07.27 |
| 죽은 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0) | 2026.07.18 |
| 텐트 치는 사람들 -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 (0) | 2026.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