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더 나은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브리서 11:13~16)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진으로 볼 때가 더 예뻤어." 사진 속 노을은 화려한데 실제로 가보면 그 순간의 빛과 공기와 냄새는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사진은 멈춰 있는데 현실은 계속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흐르고, 낡고, 결국은 스러집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사진 한 장을 보여줍니다. 흐르지 않는 사진, 낡지 않는 사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사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히 11:13)
믿음의 선진들은 약속의 실체를 두 눈으로 보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고 합니다. 오지 않은 것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오늘 이 질문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다 보면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믿음 좋아지면 인생이 산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히 말하면 순서가 뒤바뀌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순서는 반대입니다. 믿음이 임하면, 사람은 죽습니다. 이상하게 들리실 겁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11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결론이 똑같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들이 마지막에 가서는 한결같이 "믿음을 따라 다 죽었으며"로 마무리됩니다.
한 청년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대학 시절 내내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사는가"로 자신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학점, 스펙, 인맥, 자기계발서 목록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앙이 그의 삶에 정말로 들어오자, 이상하게도 그 모든 것을 향한 애착이 서서히 식어갔습니다. 여전히 성실하게 일했지만, 예전처럼 그것들에 목숨을 걸지 않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걸 못 이루면 인생 끝이다"라는 절박함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에게 붙여준 이름표, 세상이 나를 규정하던 기준들에 대한 집착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것을 히브리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여권은 이 땅의 것이지만 마음의 본적지는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진 사람, 그것이 믿음이 만들어내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갈림길을 만납니다. 화실에 걸린 두 개의 그림을 상상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그림은 이미 완성되어 액자에 걸려 있습니다. 화가는 붓을 내려놓았고, 서명까지 마쳤습니다. 관람객은 그저 그 앞에 서서 감상하고 감탄할 뿐입니다. 두 번째 그림은 아직 이젤 위에 놓여 있습니다. 밑그림만 그려진 채로, "언젠가 완성되어야 할 작품"으로 남아 있습니다. 관람객은 그 앞에서 붓을 받아 들고 함께 색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두 번째 그림처럼 생각합니다. 구원은 아직 미완성이고, 나의 성화와 노력과 선행이 그 그림을 완성해가는 붓질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신앙은 얼핏 성실하고 건강해 보입니다. "믿었으면 열심히 살아야지"라는 말은 누구도 반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첫 번째 그림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그림은 이미 완성되어 하늘 보좌 앞에 걸려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그림을 붓으로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서서 그 은혜에 감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완성된 그림 앞에 서는 것을 세상은 "불성실하다"고 비난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림이 이미 완성됐다니, 그럼 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거냐"고 말입니다.
이 오해의 뿌리는 에덴동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하나님이 완성해 주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가치를 증명하려는 본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완성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더 쌓아야만 안심이 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많은 성도들이 이 구절 앞에서 오히려 괴로워합니다.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항상 기쁘지 않아요. 남편과 다투고 나면 하루 종일 우울한데,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하니까 저는 자격 없는 신자인가 봐요." 그녀는 "항상"이라는 말을 율법의 잣대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지켜야 할 규정으로, 못 지키면 낙제하는 시험지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본래 뜻은 전혀 다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마음 깊이 믿어지기 시작하면,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연한 일은 없습니다. 감정으로는 여전히 아플 수 있지만, 그 아픔조차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 있다는 믿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을 기쁨으로 바꾸어 냅니다.
그러니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하루 종일 무릎 꿇고 있으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헛되지 않고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계속 드리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만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완성된 그림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삶은 이렇게 완전히 달라집니다.
로마서 8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이 구절을 흔히 이렇게 오해합니다. "육신대로 사는 것 = 방탕하고 죄짓는 삶, 영으로 사는 것 = 착하고 도덕적인 삶."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육신'은 단순히 부도덕함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육신대로 산다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으로 산다"는 뜻이고, 이는 하나님의 영이 떠난 자리에서 스스로 자기 가치와 자존심을 지키며 사는 삶을 말합니다.
몇 해 전, 평생 김밥을 팔아 모은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고 세상을 떠난 한 할머니의 이야기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불교 신자였습니다. 이웃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은 그 삶은 누가 봐도 감동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선행을 종교와 상관없이 얼마나 많이 했느냐가 구원의 기준일까?" 세상은 끊임없이 "얼마나 많이 내놓았는가", "얼마나 생산적인가"로 사람의 가치를 매깁니다. 회사는 실적으로, 학교는 성적으로, 심지어 교회조차 교인 수와 헌금액과 성경 지식의 양으로 사람과 공동체의 가치를 재려 합니다.
그러나 출애굽 당시 유월절 밤, 하나님의 사자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찾아갔을 때 그가 한 일은 "너희 생산성을 높여주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어린 양의 피라는 문설주의 표식, 피의 격리막을 세웠을 뿐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너희는 다 죽는다." 구원은 우리의 생산성이 아니라, 오직 그 피 위에 서 있느냐로 결정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싸워 이긴 뒤, 광야로 도망쳐 하나님께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저 혼자만 하나님께 열심을 내었사온데, 이제는 저 하나만 남았나이다." 얼핏 보면 아름다운 신앙고백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말 속에는 은근한 자부심이 숨어 있습니다. "저만큼 열심히 한 사람이 없습니다"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내가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여기서 7은 창조의 완전수이고, 1000은 완전을 상징하는 수입니다. 즉 하나님은 "네가 열심히 해서 남은 신앙의 잔당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나라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위로받기는커녕 "차라리 저를 죽여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싶었는데 그 자리마저 주어지지 않으니 오히려 낙심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키며 인간적인 최선을 다해 살았을 때, 스스로 "흠 없는 자"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뒤, 그것도 가장 활발히 사역하며 죽은 자를 살리고 돌에 맞고도 다시 일어나 복음을 전하던 그 절정의 시기에, 그는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가장 열매 많은 시기에 오히려 자신을 "사망의 몸"이라 부른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는 자신이 이룬 모든 일이 사실은 자기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빠지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성화는 우리가 이를 악물고 노력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열심으로 우리 안에서 만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개의 돌판을 주십니다. 첫 번째 돌판은 산 아래에서 이미 깨져버립니다.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첫 번째 돌판, 곧 율법은 하나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폭로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우상숭배자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자들이다"라는 사실을 낱낱이 드러내는 거울과 같습니다.
그리고 중보자 모세가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서고, 두 번째 돌판이 다시 내려와 법궤 안에 담깁니다. 이 두 번째 돌판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자들이지만, 중보자가 너희를 살렸다." 첫 돌판이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거울이라면, 두 번째 돌판은 그 죄를 대신 짊어진 은혜의 선언입니다.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보면, 저자는 놀랍게도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를 다시 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1장), 어둠을 몰아내고 제자들과 함께 거하시며(1장), 마침내 혼인 잔치의 안식으로 이어지는 흐름(2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직후, 예수님은 성전으로 가셔서 옛 질서를 뒤엎으십니다. 첫째 돌판, 곧 율법의 체제를 부정하시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성전에서 간음한 여인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배치가 아닙니다. 이후 이어지는 장면들을 하나씩 따라가 보면,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이야기를 각기 다른 인물을 통해 반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3장)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입니다. 재산도, 지식도, 율법의 준수도 흠잡을 데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거듭나야 한다." 인간의 노력으로 쌓아올린 것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위로부터 나는 출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4장)은 니고데모와 정반대의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다섯 남편을 거친, 세상의 시선으로 도무지 존중받을 수 없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하늘로부터 오신 그분이 먼저 그 우물가로 찾아가십니다. 구원은 이렇게 항상 위에서 아래로 내려옵니다.
38년 된 병자(5장)는 사흘만 누워 있어도 다리에 힘이 풀리는데, 38년을 누워 지낸 사람이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의 물이 동할 때마다 사람들은 서로 먼저 뛰어들려고 다투었지만, 이 사람은 아무리 애써도 뛸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만이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물만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자만이 "저분은 누구신가" 하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병이어(6장), 보리떡은 당시 가축이 먹던 곡식이자, 간음한 여인이 제사에 바치던 값싼 제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하찮은 보리떡과 물고기로 오셔서 우리에게 먹히십니다.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초막절(7장)은 사람들이 성전에 물을 붓고 율법을 지키려 애쓰는 그 한가운데서 예수님은 외치십니다. "내가 생수다."
간음한 여인(8장)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로 수렴됩니다. 사람들이 여인을 돌로 치려 할 때 예수님은 땅에 무언가를 쓰십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하나씩 돌을 내려놓고 떠나갑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는 말씀 앞에서, 사실은 그 누구도 죄 없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남은 것은 오직 이미 죄인으로 드러난 여인뿐이었습니다. 갈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 말씀의 진짜 의미는 단순한 용서 선언이 아닙니다. "내가 네 죄를 대신 짊어져서 내가 죄인이 되었다"는 뜻이며, 그러므로 "너는 이제 그 어떤 삶을 살든 누구에게도 정죄받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도덕적 완벽함을 요구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이제 더 이상 타인의 평가와 정죄에 자신을 내맡기며 살지 말라는 자유의 선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간음'의 진짜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간음은 배우자 외의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우리의 몸과 생각과 시간을, 오직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간음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신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8~31) 언뜻 보면 앞뒤가 안 맞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면서, 어떻게 "너희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실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머리카락까지 세고 계신 그분이, 자기 백성을 해치시려고 그 죽음을 허락하실 리 없습니다.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더 큰 생명이 드러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에서 이 진리를 "질그릇 안에 담긴 보배"로 표현합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빚어진 그릇이라, 깨지면 그저 흙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늘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는 바울의 고백은, 자신이 매일 조금씩 깨어져 감으로써 그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이 밖으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작은 상실과 아픔과 깨어짐들이, 사실은 그 안에 담긴 진짜 생명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잠언은 흥미로운 말씀을 전합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사람은 칭찬으로 말미암아 단련을 받느니라"(잠 27:21) 사람에게 칭찬받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의 목적이 되는 순간, 그곳에서 신앙은 서서히 죽어갑니다.
한 부부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저녁마다 일찍 귀가하기를 바랍니다. 남편이 일찍 들어오면 다정하게 대하고, 늦게 들어오면 냉랭해집니다. 겉으로 보면 사랑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아내가 마음속에 그려놓은 '이상적인 남편'이라는 이미지에 남편이 부합할 때만 주어지는 조건적 애정입니다.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순간 사랑은 미움으로 바뀝니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칭찬하고 존경할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되고 싶은 이상적인 인간상을 다른 사람에게 투영해놓고, 그 이미지에 맞는 사람을 만나면 "역시 인간이란 위대하구나" 하며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자는 다 거짓 선지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렴하고 성실하고 흠 없어 보이는 삶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 자체가 위험 신호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는 순간, 사람들은 그 목회자를 본받고 싶어 하게 되고, 결국 예수님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처음의 사진 이야기에서, 이 세상은 사진처럼 흘러가고, 낡아가고, 결국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흐르지 않습니다.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나라를 "영원한 현재"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서의 믿음의 선진들은 그 완성된 나라를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겪는 작은 죽음들, 작은 깨어짐들을 통과하며, 이미 예비된 본향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림을 완성해가는 노력이 아닙니다. 이미 완성된 그림 앞에서, 그 은혜에 감탄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나의 열심과 성취에 감탄하는 자가 아니라, 나를 이렇게 값없이 살려주신 그 은혜에 감탄하는 자, 그것이 오늘 우리가 붙잡아야 할 신앙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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