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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말씀 묵상

히브리서 - 지팡이 하나, 야곱의 마지막 예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14.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브리서 11:21)

한 노인이 침상에 누워 있습니다. 눈은 이미 흐려져 사람의 얼굴도 잘 분간하지 못합니다. 손발에는 힘이 없고, 숨은 가쁩니다. 그의 나이 백사십칠 세, 이제 곧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 노인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무언가에 몸을 기댑니다. 지팡이입니다. 낡고 닳은 나무 막대기 하나, 그는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몸을 세우고, 아들의 두 손자에게 손을 얹어 축복하며,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장면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 11:21) 우리는 이 구절을 스쳐 지나가기 쉽습니다. 죽어가는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손자를 축복했습니다. 그저 아름다운 가족의 장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지팡이에는 한 인생 전체가 담겨 있습니다. 사기와 도망과 씨름과 파산의 인생, 그리고 그 끝에서 만난 은혜의 인생입니다. 이 지팡이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이 구절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야곱을 처음부터 살펴보면,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형 에서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으로 속여 빼앗았고, 아버지 이삭이 눈이 어두워졌을 때 형인 척 속여 축복까지 가로챘습니다. 그러고는 형의 낯을 피해 외삼촌 집으로 도망쳐 이십 년 넘게 부모 곁을 떠나 살았습니다.

자식이 부모 곁을 떠나 수십 년간 소식 한 번 없이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목회자가 상담 중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 어머니가 이민 간 아들과 이십 년째 연락이 끊긴 채 살고 있었습니다. 명절마다 아들의 자리를 비워두고, 아들이 좋아하던 반찬을 만들다가 문득 손을 멈추곤 했습니다. "
그 애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어머니의 눈에는 그 아들이 이미 죽은 자식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에게 야곱이 바로 그런 자식이었습니다.

반면 에서는 어땠습니까? 동생이 떠난 뒤 홀로 늙어가는 부모 곁을 지켰습니다. 힘도 세고, 사냥도 잘하고, 재산도 크게 일구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본다면 에서가 훨씬 신실하고 훌륭한 아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상하게도 이 신실한 형이 아니라, 사기꾼 동생을 택하신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그것도 태중에서부터 이미 정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부딪히는 질문이 있습니다. "
왜 착한 사람이 아니라 나쁜 사람을 택하시는가?" 그러나 이 질문 자체가 이미 잘못된 틀 안에 있습니다. 야곱의 인생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이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신 이유가 그의 선함 때문이었다면, 이후 그의 삶은 점점 더 훌륭해져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야곱의 삶은 갈수록 험악해지고 남루해집니다. 그래서 이 본문의 진짜 핵심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야곱을 죽였다."

여기서 우리는 흔히 저지르는 오해 하나를 짚어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
믿음"이라고 하면 '내가 하나님을 믿는 행위'를 떠올립니다. 내가 주어이고, 믿음은 내가 하는 어떤 일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상하게도 믿음이 주어이고 사람은 그 믿음에 이끌리는 대상으로 그려집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축복하고... 경배하였으며" 문법적으로 사람이 주어처럼 보이지만, 실제 사건의 흐름을 보면 사람이 아니라 믿음이 그 사람을 이끌어 행동하게 만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은 본래 큰아들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려 했습니다. 그것이 이삭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그 뜻을 뒤집었습니다. 요셉도 아버지 야곱이 손을 바꾸어 얹었을 때 "
아버지,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이 아이가 장자입니다"라며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굳이 손을 어긋 얹어 차자 에브라임을 먼저 축복했습니다. 사람의 뜻이 아니라, 믿음이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비유해볼 수 있습니다. 기관차가 객차들을 끌고 갑니다. 객차는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기관차가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갈 뿐입니다. 그런데 그 객차 안에 타고 있는 승객, 곧 우리는 그 끌려가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고백하게 됩니다. "
아, 나는 이 지팡이만 의지해야 하는 존재구나." 이것이 로마서가 말하는 "믿음에서 믿음으로"의 진짜 의미입니다. 나의 믿음이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기관차가 나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
한 삶"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삭도 아버지처럼 아내를 위기에서 팔아넘기려 했고,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같은 패턴이 삼대에 걸쳐 반복됩니다.

이것은 이 세 사람이 각자 잘나서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 세 사람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 이르는 이야기를 쓰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이 세 사람만을 특별히 편애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이 세 사람의 삶 속에 예수가 있고, 그 예수 안에 오늘의 우리도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멈추어, 오늘 우리 시대의 신앙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대형 서점의 종교 코너에 가보면 이런 제목의 책들이 즐비합니다.
"당신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받으라", "믿음으로 승리하는 법." 이런 메시지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이것이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제시될 때 생깁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은 이 시대에 등장할 거짓 선지자를 두 짐승으로 묘사합니다.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 같은 모습으로 성부, 성자, 성령을 흉내내고,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이적과 기사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그 흉내낸 존재를 경배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짐승에게 속한 자들은 이마와 손에 표를 받는데, 그 수가 육백육십육입니다.

완전수 칠(하나님의 창조)과 삼(삼위일체)에 미치지 못하면서도 그럴듯하게 흉내내는 수, 그것이 육백육십육입니다. 이 숫자를 받는다는 것은 결국 "
내가 곧 신이다"라는 고백을 이마에 새기는 것과 같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 나의 치유, 나의 축복, 나의 성공, 이것이 신앙의 중심이 될 때, 우리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그 짐승의 표를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게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서 언니를 잃은 코리 텐 붐이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유럽 각지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는데, 어느 집회에서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낯익은 얼굴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수용소 간수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코리 텐 붐은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고 고백합니다. 손을 내밀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는 기도했고, 자신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그 손을 잡았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만약 신앙이 "
나를 위한 하나님"에 머물렀다면, 코리 텐 붐은 그 간수의 손을 절대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붙든 것은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죄인 중의 괴수인 나를 살리신 십자가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다른 죄인을 향해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을 다시 떠올려야 합니다. 우리는 왜 야곱을 욕하지 않습니까? 그는 부모를 버렸고, 형을 속였고, 장자권을 도둑질했고, 평생 임기응변과 권모술수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를 "
저 사기꾼"이라 부르지 않고 "믿음의 조상"이라 부릅니다. 왜입니까?
얍복강가의 사투 이후, 그가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 살인자들의 옷을 자기 발 앞에 맡아두었던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자신이 그 살인을 주도하고 책임지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바울을 향해 "
살인을 교사한 자,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고 손가락질하지 않습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예수를 만난 이후의 삶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회 안에서 성도라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얼마나 쉽게 정죄의 말을 쏟아내는지 모릅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저런 사람이 무슨 집사냐", "저 인간이 인간이냐." 이런 말이 오갈 때, 사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속마음에는 자기 자신은 그런 죄인이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진짜로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며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나도 그럴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이미 그보다 더한 죄를 지었다." 그것이 바로 은혜를 아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이제 얍복강가의 그 밤으로 돌아가 봅시다. 야곱은 이십 년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하며 엄청난 재산을 모았습니다. 양 떼, 종, 낙타, 그의 힘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형 에서와 마주쳐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형이 사백 명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두려움에 떨며, 자신의 소유물과 가족들을 나누어 여러 떼로 만들어 앞서 보냅니다. 자신에게 가장 덜 소중한 것부터 강 건너로 먼저 보내는 것입니다. "
이것들이 형의 화를 누그러뜨리면, 정말 소중한 것은 지켜지겠지."

그날 밤, 그는 홀로 남습니다. 그리고 어떤 존재가 나타나 그와 씨름합니다. 날이 새도록 이어지는 싸움입니다. 이 씨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야곱과 씨름하시는 이 장면은, 세상의 것을 자기 힘과 가치의 근거로 삼고 스스로 신 노릇하며 살아온 인간의 정체가 낱낱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
내가 나를 지키겠다, 내 힘으로 살아남겠다"고 여겨온 야곱의 실체가 폭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
하나님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시고"라고 말합니다(창 32:25).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이기지 못하십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신으로 삼으려는 인간의 집착이 얼마나 완강한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치십니다. 환도뼈는 히브리적 상징에서 생명과 후손을 담는 자리를 뜻합니다. 그 자리를 치심으로, 야곱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지팡이 없이는 걸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날 이후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얻는 대가로 그는 평생 지팡이를 짚어야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성공한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수성가했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왔습니다. "
나는 아무의 도움도 없이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어느 날 건강에 이상이 생겨 큰 수술을 받게 되었고, 수술 후 재활 과정에서 지팡이 없이는 한 걸음도 걷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훗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지팡이를 짚기 전까지, 나는 내가 신인 줄 알았습니다." 병상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그동안 자신을 붙들어온 것이 자기 힘이 아니라 은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야곱의 지팡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신 삼아 살아가던 인간이, 하나님께 꺾여 넘어진 자리에서 비로소 짚게 되는 지팡이. 그 지팡이는 "
나는 스스로 서지 못하는 자, 하나님께 공격받아 마땅한 자, 그러나 나 대신 죽으신 분 때문에 여전히 살아 있는 자"라는 고백 그 자체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조가 나타납니다. 야곱이 처음 집을 떠날 때, 그는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하늘 사다리의 환상을 봅니다. 그때 그는 꿈과 비전으로 가득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십 년 후, 야곱은 그 약속대로 다시 벧엘 근처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가 손에 쥔 것은 처음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많던 재산은 다 흩어지고,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지팡이 하나뿐입니다. 떠날 때는 꿈과 비전을 안고 떠났는데, 돌아올 때는 지팡이 하나 짚고 절뚝거리며 돌아옵니다.

이것을 우리는 "
실패한 인생"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성경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성도의 인생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재산뿐 아니라 우리의 꿈과 비전까지도 다 털어내십니다. 그리고 그 빈손, 그 지팡이 하나만 남은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짜 예배자가 됩니다.

창세기는 야곱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시작합니다. "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것이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서술 전환이 아닙니다. 요셉의 삶이 야곱의 삶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요셉도 아버지 곁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는 채색옷을 입은 자, 곧 장자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을 입은 자였습니다. 그리고 꿈을 꾸는 자였습니다. 형들과 부모가 자기에게 절하는 꿈, 해와 달과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 이것은 단순한 소년의 허영이 아니라, 장차 오실 만유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묵시였습니다.

그러나 그 묵시를 사는 요셉이 이 세상에서 받은 것은 영광이 아니라, 형들에게 맞아 구덩이에 던져지고 노예로 팔려가는 수모였습니다. 하늘의 장자로 예표된 자가 땅에서는 죽은 자 취급을 받는 것, 이것이 요셉의 삶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방식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잠시 열둘이라는 숫자를 생각해보면, 요셉의 꿈에서 열한 형제가 그에게 절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완전수 열둘로 완성됩니다. 열두 지파, 열두 사도,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도 열하나와 하나로 나뉘는 순간이 옵니다. 그 하나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유다는 마귀의 자리, 배신자의 자리를 대표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바로 이 유다의 자리, 죄인의 자리, 저주받은 자의 자리로 들어오셨습니다.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처럼, 원래 저주받아 마땅한 자의 형상을 스스로 취하신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 자존심과 욕망 때문에 스스로 그 죽음의 자리로 걸어 들어갔지만, 예수님은 자기 대신 그 자리에서 나머지 열한 명을, 그리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비슷한 죽음이지만, 그 방향과 이유가 완전히 다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죽은 자 취급을 받음으로써, 훗날 그 형제들이 기근에서 살아나게 된 것처럼,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죽어야 마땅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마태복음을 읽다 보면 이상한 배치를 발견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곧 빈 들에서 굶주린 무리를 먹이신 그 유명한 사건 바로 앞에, 세례요한의 죽음 이야기가 놓여 있습니다. 시간 순서로는 이미 오래전에 일어난 일인데, 마태는 굳이 이 자리에 그 죽음을 다시 배치합니다. 왜일까요?

세례요한을 죽인 사람은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그가 아내로 삼은 헤로디아는 원래 그의 동생 헤롯 빌립의 아내였고, 동시에 그의 형 아리스토불루스의 딸, 즉 그의 조카였습니다. 안티파스는 동생의 집에 갔다가 조카이자 제수인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를 두고 "
그것은 옳지 않다"고 직언했고, 그 대가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 이야기를 소재로 희곡 『살로메』를 썼는데, 그 안에서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광야의 선지자에게 매혹되었으나 거절당하자,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 목을 취하는 장면을 그려냅니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지만, 이 희곡이 포착한 본질만큼은 정확합니다. 왕궁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 자를 서슴없이 제거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성경은 광야로 장면을 전환합니다. 왕궁이 옳은 말을 하는 자를 죽이는 동안, 광야에서는 정반대의 장면이 펼쳐집니다. 하늘의 왕이신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데리고 계신데, 그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지경입니다. 왕궁의 왕은 원하는 것을 가지려고 사람을 죽이는데, 하늘의 왕은 오히려 자기 백성이 가진 모든 것을 비워내십니다.

그런 빈손의 자리에서 나온 것이 오병이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당시 보리떡은 부유한 자들이 먹는 곡식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양식이었고 율법에서는 간음죄를 지은 여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보잘것없는 보리떡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
저는 간음한 여인처럼 부끄러운 죄인입니다"라는 고백과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스스로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시며, 바로 그 부끄러운 자리에 자신을 낮추어 들어오셨습니다. 당신이 예수님 앞에 내어놓을 것은 화려한 업적이 아닙니다. "하나님, 이 보잘것없는 것도 받으시겠습니까"라며 내미는 작고 초라한 것이 바로 오병이어의 신앙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결론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결국 지팡이만, 십자가만 의지하게 됩니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붙들었던 것들, 재산이든, 명예든, 자존심이든, 심지어 신앙적 열심과 꿈과 비전까지도, 하나씩 다 털려나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해골처럼 초라해진 모습으로 약속의 땅 문 앞에 서게 됩니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
내가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으리라." 아골 골짜기는 해골이 묻힌 무덤을 뜻하는 이름입니다. 가장 부강했던 시절의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을 창녀와 같다고 부르셨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해도 속은 죽은 해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무덤에서 건져 올리는 것을 구원이라 부르십니다.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골짜기 환상이 바로 이것을 보여줍니다. 죽어 마른 뼈만 남은 자리에 하나님이 힘줄과 살과 가죽을 입히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십니다. "
이 뼈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습니까"라고 고백하는 자,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변호하지 않고 "언제든지 하나님, 저를 죽이셔도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엎드리는 자, 그가 바로 진짜 살아 있는 자입니다.

이것은 자기 파괴나 무기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으면 계속 싸우게 됩니다. 자기를 지키려고, 자기를 증명하려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끊임없이 애쓰게 됩니다. 그러나 진짜 힘이 빠진 사람은 더 이상 그렇게 싸우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붙드는 손을 놓고, 대신 지팡이 십자가, 하나를 붙드는 것입니다.

백사십칠 세의 노인 야곱이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몸을 일으킵니다. 그 지팡이는 얍복강가에서 그의 환도뼈가 꺾이던 그 밤에 시작된 것입니다. 신 노릇하던 자가 무너지고, 사기꾼이 이스라엘이 되고, 부자가 거지가 되고, 마침내 해골처럼 초라한 몸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까지의 모든 여정이 그 지팡이 하나에 담겨 있습니다.

그는 그 지팡이에 의지하여 손자들을 축복합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방식마저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는 형인 므낫세가 아니라 동생인 에브라임에게 먼저 손을 얹습니다. 요셉이 만류해도 듣지 않습니다. 세상의 질서로는 장자가 먼저이지만, 은혜의 질서는 다릅니다. 스스로 장자 되려 했던 그 모든 자들 틈에서, 차자로 오신 분이 결국 그들 모두를 살려내신다는 것을 야곱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도 저마다의 얍복강이 있고, 저마다의 지팡이가 있습니다. 아직 자기 힘으로 서 있다고 믿는 분이 계시다면, 그 씨름의 밤이 아직 오지 않은 것뿐일지도 모릅니다. 이미 무릎이 꺾이고 지팡이를 짚어야 하는 자리에 서 계신 분이 계시다면,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 지팡이야말로 당신이 마침내 진짜 예배자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우리가 붙들 것은 하나뿐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꺾이신 십자가, 그 지팡이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