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브리서 11장 23절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옛날 애굽에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이집트로 팔려갔고, 감옥살이까지 겪었지만 결국 애굽의 총리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어린 시절의 고난, 마침내 찾아온 성공, 그래서 많은 설교자들은 그를 "꿈꾸는 자", "비전의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서점에 가면 그의 이름을 딴 자기계발서들이 베스트셀러 코너에 꽂혀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요셉 본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죽고 형들이 자기 앞에 엎드려 두려워할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당신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것입니다." 주목할 점은, 요셉이 "내가 꿈을 꾸어서", "내가 비전을 품어서"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기 인생의 저작권을 스스로에게 돌리지 않았습니다. 마치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인터뷰에서 "제가 잘해서가 아니라 좋은 스승을 만난 덕분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이 단순한 겸손의 수사가 아니라 진심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생명을 구했다"는 말의 의미를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굶어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다는 뜻이라면,애초에 기근이 없었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굳이 7년 흉년을 예비하신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형들이 정말로 보존받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자신들이 죽였다고 믿었던, 가장 사랑받던 동생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살아난다는 사실은 오늘의 언어로 하면 복음 그 자체였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통해서 비로소,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한 유명한 대기업 회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밑바닥부터 시작해 마침내 그룹 전체를 손에 쥐었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 그는 자신의 사무실 창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뉴스는 온갖 이유를 추측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자리가 그에게 평안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역사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조선왕조 500년 동안 왕위에 올랐던 27명의 임금 중 상당수가 30대 이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밤마다 흥청망청 놀아서 일찍 죽었을까요?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신하들의 눈치, 끊임없는 정쟁,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긴장감 속에서 살아야 했던 그들에게, 술은 유일한 도피처였습니다. 왕좌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마음껏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밥 한 끼도 편히 먹지 못하는 자리였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가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어느 절의 승려였는데, 사이비에 가까운 생활을 하다가 어느 순간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완전히 거지처럼 살 때는 예수님이 보이더라고요."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그가 큰 인기를 얻고 많은 돈을 벌게 되었을 때, 예전엔 곁에 없던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했을 때 그의 성질을 받아주며 곁을 지키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밥이나 얻어먹으려 온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정작 그를 진심으로 아끼던 옛 친구들과는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아내가 암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밝히며 "아내 덕분에 인생관이 바뀌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직후 그는 그 아내를 두고 홀로 외국을 오가며 방송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은 묻습니다. "정말 이것이 그에게 복이었을까?"
세상은 이런 성공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라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오히려 마귀가 주는 저주에 가까울 때가 많습니다. 그 부와 인기를 손에 쥔 사람이 예전처럼 조용히 성경이나 읽으며 사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의 하나님은 이제 "하늘이 도와서", "다 은혜로 이만큼 됐다"는 말속에 박제된 하나님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시련이 다시 찾아오면, 그는 자기 생각과 기준으로 하나님을 재단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며 말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현상, 성공과 실패의 결과로 함부로 평가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분입니다.
다시 요셉의 이야기에서 그는 애굽에서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위치에 있었습니다. 스스로 "내가 바로에게는 아버지와 같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마음만 먹었다면 자기 후손들이 대대손손 애굽에서 특권을 누리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해놓고 떠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반대로 말했습니다. "여기서 나가라." 자신이 쌓은 모든 기득권을 뒤로하고, 형제들을 향해 이 땅을 떠나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에서 정말 중요했던 것은 그가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인생을 스스로 설계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게 자기 인생을 내어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언가 더 큰 그림을 그리시기 위해, 요셉이라는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붓처럼 사용하신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끝나고, 히브리서는 곧바로 한 부부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얼굴도, 이름도 본문에는 나오지 않는 두 사람, 그들은 아기를 낳았고, 그 아기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겼습니다. 처음 이 구절을 읽으면 의아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예뻐서 숨겨 키운 것이 뭐 그리 대단한 믿음입니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해서 지키려는 것은 인지상정 아닌가요?
그런데 정확히 그 지점이 핵심입니다. 성경이 이것을 "믿음의 행위"로 기록했다는 것은, 당시 다른 부모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애굽 왕 바로는 히브리 사람들에게서 태어나는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라 명령했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 명령이 무서워 순순히 따랐을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나일강으로 걸어가야 했던 부모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인간의 생존 본능 앞에서, 그 명령을 거스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잔인하지만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례 하나를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의 731부대는, 인간의 모성애가 죽음 앞에서도 유지되는지를 실험이라는 명목으로 확인한 적이 있습니다. 갓 아기를 낳은 엄마를 아기와 함께 뜨겁게 가열되는 방에 가두었다. 처음에는 아기를 꼭 끌어안고 있던 엄마들이, 정말로 죽음이 눈앞에 닥치자 결국 아기를 발밑에 두고 위로 올라섰다고 합니다. 인간의 생존 본능은 그토록 강력합니다. 모성애조차 이겨낼 만큼 말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부모는 정반대로 행동했습니다. 자기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아이를 숨기고 지켰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오직 믿음이 개입했을 때에만 가능한 선택이었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남습니다. 본문은 왜 굳이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라고 기록했을까. 갓 태어난 아기가 처음부터 이목구비 뚜렷하고 잘생긴 경우는 거의 없다. 아기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갓난아기는 대개 얼굴이 쭈글쭈글하고 부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단순히 외모에 관한 묘사가 아닐 것입니다.
바로 앞 절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이 생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모세의 이야기에서, 그 저자는 다시 한번 그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이야기로 우리를 이끕니다. 모세는 장차 이스라엘의 중보자로 세워질 사람이었고, 동시에 진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참으로 아름다운 아들을 훗날 십자가에 내어주셨다는 사실, 그것을 모세의 탄생 이야기가 미리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또 하나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세상의 그 어떤 권세자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참소하고 없애려 해도, 그 자녀들이 예수로 옷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켜내신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의 생애 전체가 그 진리를 증명하는 살아있는 예화였습니다.
모세의 부모가 보여준 것은 단순히 "아기를 살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이 지켜낸 그 아기가 훗날 예수를 예표하는 존재였다는 데 이 이야기의 진짜 무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읽는다면,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거는 것, 그것이 성도의 삶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내 이름, 내 체면, 내 안전은 쇠하여지고, 대신 예수의 은혜와 십자가가 드러나는 삶, 그것이 믿음을 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에서 사람들이 몰리는 인기 있는 설교, 인기 있는 교회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성도들의 기를 세워주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만큼 열심히 헌신하면, 하늘에서든 이 땅에서든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다"고 약속하며 성도들의 열심을 부추기는 곳일수록 규모가 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구조 안에서는, 심지어 목회자가 무례한 언행을 하거나 함부로 대해도 성도들이 오히려 감격합니다. "주의 종께서 나에게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져 주시다니." 이런 심리를 사도 바울은 정확히 짚어낸 바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2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탄식합니다. 가짜 사도들이 찾아와 뺨을 때리고 그들의 것을 노략질해도, 성도들은 오히려 그것을 잘 참아낸다는 것입니다. 마치 학대를 친밀함의 증거로 착각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의 행위나 업적을 근거로 삼아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모든 가르침은 거짓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경연장으로 만들어, 우리가 얼마나 성숙해지는지 심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우리 삶 속에 그려가시면서, 믿음을 선물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알게 하시는 것, 그것이 역사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누군가 우리의 신앙적 수고를 조금이라도 낮춰서 평가하면 크게 반발합니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데 감히"라며, 하지만 그렇게 자기 행위와 자격을 붙들고 불안해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을 향한 모독일 수 있습니다.
한 가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갓난아기가 실수로 방바닥에 오줌을 쌌다고 해서, 자기 짐을 싸서 기어서 집을 나가려 한다면 부모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스스로 나가는구나" 하고 대견해할까요?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다시 아버지 품으로 기어들어 오는 것이 자식입니다. 반대로, 아이가 뭔가 잘못했다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밥도 안 먹은 채 혼자 벌을 서고 있다면, 그 모습을 부모가 흐뭇해할까요? 오히려 부모는 어떻게든 그 문 앞에 도시락이라도 놓아두려 애씁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저지른 잘못은 내가 책임진다"는 태도로 하나님 앞에 서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히 2:14~15)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사람들을 평생 사망의 공포로 옭아매는 마귀의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내 모습, 내 부족함을 보며 불안해합니다. 아직도 죽음이 두려운 것일까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 사망은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이미 완전히 무너뜨리셨다고, 믿는 자는 이미 예수 안에서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기 때문에, 그 어떤 사망도 더 이상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믿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복음, "좋은 소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귀를 뿔 달린 존재, 언제든 우리를 해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괴물처럼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는 성경보다는 조로아스터교 같은 이원론적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에 가깝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마귀는 조금 다릅니다. 욥기와 스가랴서를 보면, 마귀는 하나님의 어전회의에서 고개를 숙이고 앉아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만약 마귀가 하나님과 대등하게 맞서는 존재라면, 왜 매번 하나님 앞에서 명령을 받아야 할까요? 이는 마귀가 하나님이 한시적으로, 이 역사 속에서 당신의 백성을 교훈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마귀는 "돌로 떡을 만들라"고 유혹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정말로 생명의 떡이시고(요한복음 6장), 돌이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찢겨 우리의 양식이 되신다는 것은 원래 맞는 복음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진리를 인간의 유익과 편의를 위한 것으로 왜곡시킵니다. 예수님은 그 왜곡을 정면으로 부수셨습니다. 흥미롭게도,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이 "내가 떡을 찍어주는 자가 나를 팔 자"라고 하셨을 때 언급된 마귀와, 광야에서 돌로 떡을 만들라 유혹했던 마귀는 같은 단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그 떡을 받아먹었지만, 예수님이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며 잔을 내미시기 전에 자리를 떠났습니다. 새 언약의 핵심 앞에서, 성경과 십자가를 어설프게 붙들고 왜곡시키는 것, 그것이 진짜 마귀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절이나 이방 종교의 자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흐리게 만드는 모든 것, 그것이 마귀입니다. 심지어 그것은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겉으로는 건강하고 개혁적인 신앙생활처럼 보이는 곳에도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렌즈로 걸러내지 못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그 안에서도 속을 수 있습니다.
에스겔 18장에는 세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할아버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키며 거룩하게 살았습니다. 그 아들은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손자는 다시 할아버지처럼 거룩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이 셋 중에 누가 살겠느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을 인용하며, 자신들이 조상의 죄 때문에 억울하게 심판받는다고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확히 그 논리로 되받아치십니다. 진짜 공평의 원리대로라면, 중간에 있는 방탕한 아들이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를 낳은 교회이자 동시에 내가 낳는 존재인 예수, 바울의 언어로는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대신 그 신 포도의 이 시림을 짊어지셨습니다. 공평의 원칙대로라면 우리 모두가 죽어야 마땅했지만, 우리가 먹은 신 포도로 인해 대신 이가 시려온 것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장은 바로 이 에스겔 18장의 비유를 그대로 이어받아, 새 언약의 의미를 풀어냅니다.
요셉과 모세의 부모, 이 두 이야기는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상황이지만 같은 진리를 가리깁니다. 세상이 부러워하는 성공과 지위는 결코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진짜 믿음은 우리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예수가 드러나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놓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와 마태복음은 똑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그리고 요한복음은 그 말씀이 다름 아닌 예수님이라고 알려줍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고백처럼, 내 안에 사는 이는 더 이상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시라는 것, 그것이 우리가 붙들어야 할 유일한 진리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십자가 하나만 붙드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우리가 진짜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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