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해 겨울,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존경해 온 선배를 찾아갔습니다. 그 선배는 한때 업계에서 손꼽히는 기획자였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마주한 그의 얼굴은 낯설게도 편안했습니다. 바쁘다 못해 늘 초조해 보이던 예전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묻자, 그는 찻잔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말했습니다. "요즘은 좀 비우고 살아." 그 말이 오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가 가장 잘나가던 시절, 그의 책상 위에는 빈 공간이 없었습니다. 기획서, 메모지, 참고 도서, 수첩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고, 달력은 빨간 펜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는 단 하루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 했습니다. 쉬는 날에도 세미나를 들었고, 휴가 중에도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완벽하게 채워진 하루만이 의미 있는 하루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는 중요한 프레젠테이션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머릿속이 텅 빈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 상대가 듣고 싶어 할 말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어느 것도 먼저 나오지 못했습니다. 가득 찬 그릇이 오히려 쏟아질 위험에 처한 것처럼, 그의 언어도 그 무게에 무너졌습니다.
물은 막힌 곳에서 썩습니다. 끊임없이 흘러야 맑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흐른다는 것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의 연속입니다. 강이 아름다운 것은 물을 붙들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배는 번아웃 이후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연습을 했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고통이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이 낭비처럼 느껴졌고,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억지로 비워낸 그 시간들 속에서, 오히려 오랫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길가의 나무가 어떤 모양으로 가지를 뻗고 있는지, 아내가 밥 먹을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채움으로 가려져 있던 것들이, 비움으로 인해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자기를 빚는 장인들은 흙을 반죽할 때 일부러 공기를 빼낸다고 힓니다. 작은 기포라도 남아 있으면, 높은 온도의 가마 속에서 그릇이 산산이 부서지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탄탄해 보여도, 속에 가득 찬 공기가 결국 그것을 무너뜨리는 원인이 됩니다. 비워내는 과정이 없으면, 아무리 정성껏 빚어도 온전한 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는 스스로를 단단히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채우려 합니다. 지식을 쌓고, 경험을 늘리고, 관계를 확장하고, 일정을 꽉 채웁니다. 하지만 정작 내면에 쌓인 불안과 집착, 내려놓지 못한 욕심들은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조용히 기포처럼 자리 잡고 있다가, 결국 가장 뜨거운 순간에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선배는 요즘 일주일에 한 번, 아무 계획도 없는 날을 일부러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 날만큼은 알람도 맞추지 않고, 약속도 잡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냥 아침에 눈이 떠지면 일어나고, 걷고 싶으면 걷고, 앉고 싶으면 앉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 시간이 텅 비어 보였지만, 이제는 그 시간이 가장 많은 것으로 채워지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비워두면 뭔가 들어오더라고. 억지로 채우려 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내 하루를 떠올렸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것으로 빈틈없이 나를 채우고 있는가, 그리고 그 가득함 속에서, 나는 정말 흐르고 있는가.
부족함은 결핍이 아닙니다. 비워진 공간은 가능성입니다. 다 채우지 않은 문장이 더 오래 마음에 남고, 다 말하지 않은 감정이 더 깊이 전해지듯, 인생에도 여백이 있을 때 비로소 깊이가 생깁니다. 흐르는 것은 비어 있기 때문에 흐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단단해지는 순간은 무언가를 더 쌓았을 때가 아니라, 쥐고 있던 것을 조용히 내려놓을 수 있을 때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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