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한복음 8:11)
아침 햇살이 비치는 성전 마당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죄인을 끌고 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세웁니다. “선생이여,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야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그들의 질문은 단순한 율법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시험하기 위한 덫이었습니다. 율법을 따르자니 사랑이 부정되고, 사랑을 택하자니 율법이 무너지는 그들이 만들어낸 함정 속에서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몸을 굽히셔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율법은 거룩한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입니다. 그 앞에 설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땅에 쓰신 그 손가락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돌판에 새기신 그 하나님의 손가락과 같습니다. 율법은 거룩하지만, 동시에 죄인을 정죄하는 거울입니다. 그 거울 앞에 선 인간은 모두 “무게가 부족한 자”(단 5:27)로 드러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거울을 다른 사람에게 들이댔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거울을 그들의 심장 앞에 놓으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한 마디 말씀 앞에서, 그들의 양심은 무너졌습니다. 죄 없는 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씩, 하나씩 돌을 내려놓고 떠났습니다.
모두가 떠나간 자리에는 오직 두 사람만 남았습니다. 정죄받아 마땅한 여인과, 정죄할 권세를 가진 예수님. 세상의 모든 죄인을 상징하는 여인과, 세상의 유일한 의인 되신 예수님이 마주 서 계십니다. 이 장면은 마치 십자가의 모형과 같습니다.
죄인의 자리에 인간이 서 있고, 의로우신 분은 그 죄인의 옆에 서서 죄인을 대신해 심판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가능한 이유는 단 하나, 그분이 곧 율법의 완성이며, 그분의 몸 위에 하나님의 공의가 이미 집행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반드시 심판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공의가 죄인을 죽이지 않고,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죄 없는 분이 죄인을 대신해 죽으시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요구를 자신의 피로 완성하러 오셨습니다(마 5:17). 그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은 결코 죄를 가볍게 여긴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말은 “내가 너 대신 정죄를 받겠다”는 구속의 약속입니다. 그녀는 풀려나지만, 주님은 십자가로 향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십자가에서 만족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은 그 십자가에서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공의는 죄를 미워함으로 완전했고, 사랑은 죄인을 살림으로 완전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선언은 은혜의 시작입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은 은혜의 완성을 향한 부르심입니다. 이것은 행위의 명령이 아니라 새 생명의 방향성입니다. 그 여인은 율법에 의해 죽을 몸이었지만, 예수님의 은혜에 의해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새 생명을 얻은 자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죄받은 여인’이 아니라 ‘용서받은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레미야 17:13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흙에 쓰셨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이름, 곧 죽을 자의 운명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흙에 기록된 이름을 지워주시고, 당신의 피로 생명책에 새 이름을 기록하십니다. 그녀의 인생은 ‘죄의 현장’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그 경계선이 바로 예수님의 손가락, 즉 십자가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날 성전 마당에서 예수님은 공의와 사랑이 충돌하는 자리에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 안에서는 공의와 사랑이 충돌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공의를 지키시며 사랑을 이루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정죄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죄로 인해 낙심한 영혼에게, 율법 앞에서 무너진 자에게, 주님은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는 사랑이 아니라, 죄를 대신 짊어진 사랑입니다. 공의를 폐한 사랑이 아니라, 공의를 완성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오늘도 우리를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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