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요한복음 7:6)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머무신 지 약 육 개월이 지나 초막절이 가까워졌습니다. 유월절(3~4월) 이후 초막절(9~10월)까지의 시간, 주님은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을 갈릴리에 머무셨을까요? 요한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 함이러라.”(요 7:1) 예수님은 단지 피하신 것이 아니라,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인간의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 속에서 움직이셨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습니다.”(요 7:3~4) 그들의 말은 세상적 성공의 논리입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야 유명해지고, 그래야 영향력이 생긴다.” 그러나 요한은 이 말을 곧장 이렇게 평가합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 7:5)
믿지 않는 자들은 언제나 ‘자기 때’를 살아갑니다. 그들의 때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즉,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증명하고자 하는 때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입니다. 그런 자들은 언제나 기적을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사용하려 합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유용한 신(神)”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요 7:6) 불신자의 때는 ‘항상 준비된 때’입니다. 항상 자기가 나설 준비가 되어 있고, 자기를 증명할 계획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간은 하나님의 때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때”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과 함께 오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인기가 절정일 때도, 사람들이 왕으로 모시려 할 때도, 조용히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요 6:15). 그리고 십자가의 때가 다가올 때,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완전히 실패한 그때, 그분은 “때가 이르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2:23).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그 영광은 십자가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고지(高地)’가 아니라 ‘십자가’를 택하셨습니다. 그분은 자기 증명과 자기 과시의 유혹을 거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이 박수 치는 때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때에 순종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고지론(高地論)" 이라는 이름으로세상의 정상에 오르는 것을 신앙의 목표처럼 말하는 흐름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정치, 경제, 문화의 고지에 올라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거부하셨습니다.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 모든 나라의 영광을 주겠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 4:7)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권력의 방식이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섬기며 피 흘리는 십자가의 방식입니다. 주님은 고지를 점령하지 않으시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참된 신자는 자기를 증명하고 자랑하기 위해 예수를 이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삶이 내 안에 재현되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그 삶은 세상적으로는 어리석고, 손해 보는 길이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내가 비워지고 낮아질 때, 그로 인해 다른 이들이 유익을 얻는 삶이 예수의 삶입니다. 그 삶이 바로 ‘신자의 때’에 맞추어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나타내라”는 동생들의 조언을 거절하셨지만, 며칠 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비밀히 올라가셨습니다.”(요 7:10) 그분은 세상의 명성을 따르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때, 아버지의 뜻, 그 한 가지 이유로만 움직이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환호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순종해야 합니다. “신자의 때”는 바로 그때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때, 그때가 바로 우리의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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