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5)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위해 나를 찾고 있는가? 이 땅에서 잠시 배를 채우기 위한 떡을 원하느냐, 아니면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떡을 원하느냐?”
예수님 당시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그들의 배가 불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은 사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표적이었지만, 사람들은 표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눈앞의 떡만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49~51)
광야에서 주어진 만나가 아무리 신비로운 하늘의 양식이었다 해도 결국 그 맛을 본 이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만나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표징이었을 뿐입니다.
만나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날마다 공급하신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루치밖에 거두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다음 날을 준비하려고 남겨 두면 썩어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은 단순합니다. “내일은 내가 책임진다. 너희는 오늘 나를 의지하라.”
하지만 이스라엘은 불안했습니다. 혹시 내일 만나가 내리지 않으면 굶주리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 몰래 더 거두어 두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불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꾀와 노력으로 내일을 보장받으려는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내일을 준비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그래서 재물, 명예, 권력, 건강, 인간관계라는 이름의 “만나”를 더 움켜쥐려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결국 썩고 사라져 버립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51).
예수님이 주시는 떡은 단순히 우리의 육신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찢기신 주님의 살과 피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주님의 몸이 곧 우리의 참된 양식이며,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 곧 영원한 음료입니다.
이 떡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성찬에 참여하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나의 생명으로 삼고, 주님의 부활을 나의 소망으로 붙드는 삶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 안에 거하며 예수님으로 살아가는 것이 영생의 떡을 먹는 삶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며 살고 있는가? 혹시 여전히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예수님 당시의 무리들처럼, 배를 채우는 떡만을 원하며 주님을 찾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모르지 않으십니다. 자녀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버지의 뜻과 기쁨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면서 아버지를 단지 필요를 채워주는 수단으로만 삼는 태도입니다. 그것은 참된 자녀의 모습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버지, 제게 필요한 것은 오직 아버지 자신입니다.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만나는 결국 썩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떡은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의 떡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이 땅의 만나를 구하겠느냐, 아니면 영생의 떡을 구하겠느냐?” 우리의 삶이 세상의 배부름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 자신을 먹고 마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믿음의 여정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명의 떡과 개혁주의 신앙의 원리 (0) | 2025.09.17 |
---|---|
하늘의 생명을 주시는 떡, 예수 그리스도 (1) | 2025.09.10 |
영원한 생명을 위한 참된 수고 (0) | 2025.09.04 |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과 풍랑의 의미 (1) | 2025.08.31 |
오병이어와 물 위의 기적 (2) | 2025.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