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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생명의 떡과 개혁주의 신앙의 원리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9. 1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7)

요한복음 6장은 우리 신앙의 본질을 아주 뚜렷하게 드러내는 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수많은 무리를 먹이셨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진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그 선지자’라 부르며, 자신들의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열망이 있었습니다.
“이 분만 따라가면, 우리는 더 이상 굶지 않고, 더 이상 로마의 압제 아래 있지 않으며, 이 땅에서 풍족하게 살 수 있겠구나.”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기대를 단호히 거절하셨을 때, 그들의 반응은 차갑게 돌아섰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주러 오신 것은 세상의 떡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의 배를 채우는 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떡. 이 말씀이 불편했던 수많은 무리들은 주님 곁을 떠나갔습니다.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사실 지금 우리의 신앙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그분을
‘세상의 떡을 주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며, 세상 속에서 경쟁에서 이기도록 도와주는 분으로만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오히려 자신을 내어주셔서 우리가 먹고 살 수 있게 하신 떡이십니다. 그분의 희생으로 우리가 살아난 것입니다.

세상의 질서는 철저히 제로섬(zero-sum) 게임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누군가가 더 많이 가지면, 누군가는 반드시 빼앗기게 되어 있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툼도 결국 더 많이 차지하고 더 높아지려는 욕망 때문에 시작됩니다. 세상의 행복은 누군가를 밟고 올라섬으로 얻어지는, 참으로 잔인한 행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세상의 법칙을 뒤집어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더 가지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자신을 비워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 되셨다는 말은, 우리가 주님을 먹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기꺼이 찢기시고 나누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먹은 성도는 이제 다른 이들에게 먹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작은 예수가 되어, 다른 이들에게 사랑과 희생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여전히 다른 이들을 밟고 올라서면서 그 위에서 쾌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곧 살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3장은 분명히 말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느니라”(요일 3:15).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단순히
‘죽은 후 천국에 가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생을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삶이고,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요 6:54)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먹고 마신다는 동사가 모두 현재형입니다. 즉, 단번에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삶의 방식을 가리킵니다. 예수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성찬식에 참여하는 의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일의 삶 속에서, 나를 희생하며 이웃을 살리는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 보고, 내가 져주고, 내가 희생함으로 다른 이가 풍성해진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주님의 형질이 내 형질이 되고, 주님의 기질이 내 기질이 되며, 주님의 마음과 성품이 내 속에서 자라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6장 36~40절을 보면, 여기에는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 소위 오대 강령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전적 타락 :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36절).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능력이 없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조건적 선택 :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37절).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제한 속죄 :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39절).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막연히 위해 흘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확실히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불가항력적 은혜 :
“아버지께서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37절).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성도의 견인 :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39, 40절). 구원받은 성도는 끝까지 보존됩니다.

이 다섯 가지 원리가 단순한 교리적 체계로만 머무르지 않고,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나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였음을 고백할 때, 오직 은혜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내가 택함 받은 존재임을 알 때, 내 삶은 은혜에 대한 감사와 경외로 가득합니다. 주님의 피가 실제로 나를 위해 흘려졌음을 믿을 때, 나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강권적으로 붙드셨음을 알 때, 나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날의 부활을 확신할 때,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음을 믿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세상의 떡을 주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생명의 떡이 되어 우리에게 먹히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먹었다면, 우리 또한 다른 이들에게 먹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고, 섬기고, 내어주며, 그렇게 살아감으로 우리는 영생에 참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6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예수를 세상의 떡으로 찾고 있는가, 아니면 생명의 떡으로 먹고 있는가?” 오늘도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는 작은 예수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