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요한복음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0. 8.

요한복음 6장 60~71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한복음 6:68)


“이 말씀은 어렵도다.” 제자들이 이렇게 수군거렸을 때, 그들의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원어로 보면, ‘용납하기 어렵다’,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논리적으로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단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
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만이 영생을 얻는다.”


그러나 그 말씀은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 완전히 다른 방향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의 문제 해결’을 원했습니다. 배고픔이 해결되고, 가난이 사라지고, 병이 나아지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생명이 주어질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현실의 유익을 구하는 ‘떡의 신앙’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죄와 사망을 이기는 ‘영생의 신앙’을 요구했습니다. 그 간극이 너무 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내를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걸림돌’이라는 말은 우리가 정한 방향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걸림이 된 것은 그들이 이미 정한 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자신의 꿈과 계획, 그리고 세상의 성공’으로 향한 길이었습니다. 그 길 위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들고 서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때로는 우리 인생의 계획을 방해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욕심과 충돌할 때, 그 말씀은 달콤한 위로가 아니라 아픈 거울이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 말씀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 길을 막는 하나님의 사랑이 됩니다. 때로는 우리의 계획을 꺾으시고, 우리를 멈추게 하시며, 그 자리에 십자가를 세워 놓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시작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신앙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육은, 곧 인간의 노력과 지혜와 행위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참 생명은 오직 성령으로, 살려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집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완벽한 자만 살릴 수 있습니다. 단 한 번의 실수로도 모든 율법은 무너집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무너진 율법의 자리에 오셨습니다. 율법이
‘먹으면 죽는다’고 선언했던 그 자리에 예수님은 ‘먹으면 산다’는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 안에서 만들어내는 생명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 은혜로 주어지는 생명입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 곁을 떠난 사람들은 ‘주님이 어려워서’ 떠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대가 무너져서’ 떠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내 뜻을 이루어 주실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내 뜻이 아니라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가르칩니다. 그 차이를 견디지 못한 자들은 결국 뒤돌아섭니다.

예수님은 그때 남은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이 고백은 단순한 충성의 외침이 아닙니다. ‘주님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라는 절망적 고백이자 ‘주님이 나를 붙드셨기에 나는 떠날 수 없습니다’라는 은혜의 고백입니다.

베드로는 이후에도 실수합니다. 주님을 부인했고, 세상 권세 앞에 떨었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물을 던지는 베드로를 찾아가 부활하신 몸으로 그를 불러내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그의 인생을 새 방향으로 이끄십니다.

베드로는 결국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끌려가 순교의 자리로 갑니다. 주님이 말씀하셨던 대로입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집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놓아도, 주님은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흔들려도, 주님은 우리의 손을 더 강하게 붙드십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의 고백은 “내가 주님을 붙잡습니다”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붙잡고 계십니다”입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이 고백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진 질문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더 나은 조건, 더 편한 길, 더 큰 만족을 약속하며 “예수를 떠나도 괜찮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 외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떡은 썩습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은 먹는 자로 하여금 영원히 살게 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대답해야 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이 고백이 단순한 결심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붙들린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넘어지고 흔들릴지라도,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이 곧 영생의 말씀이시며, 그분 안에 우리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오늘도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그분의 생명이 당신을 새롭게 일으키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의 고백이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이제는 제가 주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저를 붙드심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