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라디아서 4:22~26)
한 마을에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빚 때문에 종으로 팔려 온 여인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아이의 신분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는 종의 자식이었습니다. 신분은 행실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누구냐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아이는 자유로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태어나는 순간 자유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자유자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려주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과 사라에게서 난 이삭, 하나는 여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났고,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약속으로 말미암아 났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두 여자가 바로 두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종종 바른 삶의 조건과 기준을 제시하고, 사람들은 그 기준에 자신을 견주며 부족함을 느끼면 더 노력하려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틀이 무너집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창녀로 변장해 시아버지와 동침한 이야기, 롯의 두 딸이 아버지와 동침해 후손을 이은 이야기, 이런 본문들은 "바른 생활"의 교과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이야기들이 성경에 남아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믿음의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이 이루신 일에 감사하는 자로 세우는 것이 믿음의 목적입니다.
한 사람이 큰 빚을 탕감받았다고 해보십시오. 그런데 그가 자신이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었는지, 그 빚 때문에 어떤 처지에 놓여 있었는지 전혀 모른다면 어떨까요? 그는 "탕감받아서 좋다"는 감정만 있을 뿐, 탕감해 준 사람의 사랑과 긍휼의 크기를 결코 헤아리지 못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굳이 2100년 전 아브라함의 옛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이 무엇인지 알려면 저주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죄를 모르고는 용서의 깊이를 알 수 없듯이, 종의 신분이 무엇인지 모르고는 자유자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불편해하는 죄와 저주의 이야기를 결코 생략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생략되는 순간, 용서와 자유는 그저 "당연한 내 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지만 10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기다림이 길어지자 사라는 스스로 방법을 찾았습니다. 여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 한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언어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믿음에 행함을 보태는 것."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그 믿음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내려는 시도입니다.
어느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다"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거래를 성사시킵니다. "결과가 좋으면 하나님도 기뻐하시겠지"라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하갈을 통해 얻은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이 될 수 없었듯,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낸 행함은 결코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을 가리는 안개가 될 뿐입니다. 교회가 자주 놓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이런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얼핏 경건해 보이지만, 실은 믿음을 자기 힘으로 증명해 보이려는 육체의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둘로 나눕니다. 지금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노릇 하는 곳이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이며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이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본래 육체를 따라 난 종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이제는 언약대로 유업을 이을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종이었던 사람이 어느 날 왕의 아들로 입양되어 신분이 완전히 뒤바뀌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이 왕의 자녀가 된 것은 자신의 노력이나 선행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입양해 준 왕의 결정과 사랑 때문입니다. 성도의 신분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자유자가 된 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신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두 언약은 우리에게 구원도, 죄도,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 힘으로 죄를 극복하거나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히 여기심이 나를 살게 하십니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행함으로 십자가를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무엇이 나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했는가를 증거하며 삽니다.
시편 23편의 고백인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는 오직 이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음을 아는 자만이 진정으로 부를 수 있는 찬송입니다. 종으로 태어났으나 자유자로 다시 태어난 우리, 그 신분의 전환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전적으로 위에 있는 예루살렘, 곧 그리스도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행함이 아니라 감사로, 자기 증명이 아니라 십자가로 삽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라디아서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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