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갈라디아서 4:17~20)
아이를 낳아 본 어머니는 압니다. 진통이 시작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자기 몸이 아닙니다. 자신의 고통이 무언가를 위한 고통이 되는 순간, 삶의 무게중심이 조용히 이동합니다. 그 순간부터 세상은 달라집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머니의 이전 세계는 사라집니다. 자신의 즐거움과 편안함을 위해 살던 세계가 끝나고, 전혀 다른 존재를 위한 세계가 시작됩니다. 이것을 구원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바울은 그렇게 부릅니다.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이 말을 처음 읽으면 자연스럽게 어떤 그림이 떠오릅니다. 열정적인 목회자가 성도들을 위해 밤을 새우며 기도하고, 눈물로 설교를 준비하는 장면, 마치 아이를 낳는 어머니처럼 고통을 감수하며 성도를 품는 사도의 모습, 그러나 그 그림은 절반만 맞습니다. 나머지 절반을 놓치면, 바울이 말하는 핵심을 통째로 잃게 됩니다.
먼저 질문 하나를 던져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흔히 이런 대답이 돌아옵니다. 하나님을 믿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예전보다 더 선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 이 대답은 틀리지 않은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바울의 눈에는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선해지려는 노력, 의롭게 보이려는 열심, 믿음을 스스로 관리하고 증명하려는 욕망, 이것이 갈라디아 교회를 망가뜨린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세상을 다스리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자주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도덕적 탁월함이나 이성적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니 사람도 선하게 살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덴에서 일어난 일을 보십시오. 뱀의 말을 들은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선악을 규정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는 다스리는 자의 자리에서 다스림 받는 자의 자리로 추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욕망에 다스려지고, 두려움에 다스려지고, 죽음에 다스려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참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후서 4장 4절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선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처음 의도하신 참된 인간의 모습, 그 원형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우리가 더 선해진다거나, 더 경건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다스림을 받는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해산의 의미가 비로소 선명해집니다.
창세기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은 여자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단순히 출산의 육체적 고통에 대한 벌로만 읽으면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자식을 낳고 자식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모의 욕망을 채워줄 만족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기대를 저버릴 때, 그 고통 전체가 죄의 저주 아래 있는 흔적으로 드러납니다. 해산의 수고는 그래서 저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전서 2장은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해산 이후, 어머니의 세계는 완전히 뒤집어지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의 세계가 해체되고, 자기 안에 잉태된 새 생명이 삶의 이유가 됩니다. 자기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가 삶의 중심이 되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의 탄생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라는 새 씨가 잉태되고, 그로 인해 이전의 자기 중심적 세계가 끝나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해산하는 수고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처음 만났을 때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처럼, 그리스도 예수처럼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집하자 그들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참된 말을 한다는 이유로 그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20절) 이 말은 체념이 아닙니다.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바울의 수고는 갈라디아 성도들이 더 나은 신자가 되도록 격려하는 수고가 아니었습니다.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 그리스도에게 다스림 받는 새로운 피조물로 서게 될 때까지 자기 자신을 위한 세계가 무너지고 그리스도를 위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될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수고였습니다.
17절과 18절에서 바울은 거짓 사도들의 열심과 자신의 열심을 대비시킵니다. 거짓 사도들의 열심은 성도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오려는 열심입니다. 좋은 말로, 열정적인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자기를 중심으로 모이게 하는 것입니다. 반면 바울의 열심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열심입니다. 자기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을 위한 열심입니다.
이 둘은 겉으로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둘 다 성경을 가르치고, 둘 다 열정적이며, 둘 다 성도의 유익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끝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점점 그 사람을 의존하게 되는지, 아니면 점점 그리스도 앞에 홀로 서게 되는지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속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조금 다른 빛 아래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더 선해지고 더 경건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질수록, 선하다고 여겼던 것들조차 죄로 드러납니다. 자기 의로움으로 믿음을 증명하려 했던 모든 시도가 얼마나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었는지가 밝혀집니다. 저주와 심판이 차고 넘치는 자리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의 의미가 비로소 살아납니다.
십자가의 용서의 은혜는,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자리에서는 발산되지 않습니다. 죄가 죄로 드러나 죽음의 존재임을 실감하는 자리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은 은혜의 향기가 퍼져나갑니다. 행함으로 은혜의 향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도구로 존재할 때 향기는 자연히 배어 나옵니다.
바울의 해산하는 수고는 결국 이것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위한 인생이 끝나고, 그리스도를 위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 자기 믿음의 주도권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에게 다스림 받는 것, 어머니가 해산 이후 다시는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형상이 잉태된 사람도 이전의 자기 세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선물로 받은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뜻에 붙들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인생도 그 뜻에 붙들려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나타내는 도구로 살아가는 것이 해산의 수고 끝에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이 서 있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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