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갈라디아서 4:21)
어느 고등학교에 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시험이 끝나면 아이들은 서로 몇 점을 맞았는지 비교하며 웃고 떠들었지만, 그 학생만은 시험지를 받아 드는 순간부터 표정이 굳었습니다. 100점을 맞아도 안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엔 운이 좋았을 뿐이야. 다음엔 실수할지도 몰라.' 그는 늘 자신을 채점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가장 무서운 심판관이었던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자신을 채점하고 있습니다. '오늘 얼마나 경건했는가, 얼마나 죄를 짓지 않았는가, 얼마나 말씀대로 살았는가.' 이 채점표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한, 십자가 아래 있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율법 아래 서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묻습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갈 4:21). 이 물음은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던져집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죄를 지어도 용서받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함부로 살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은근히 조건을 답니다. 예수 믿기 전 죄는 용서받아도, 믿은 후에 짓는 죄는 회개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마치 계좌를 하나 새로 트고, 그 계좌는 다시 입출금 내역이 꼼꼼히 기록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일서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범죄하지 못한다고 말입니다(요일 3:8~9).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당황합니다. 죄짓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아무도 없다는 뜻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요한일서가 말하는 '죄'는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방식, 곧 자기 기준으로 선과 악을 나누어 스스로를 정죄하거나 의롭다 하는 그 체계 자체를 가리킵니다. 반면 십자가의 세계는 그런 채점표가 아예 없는 세계, 정죄가 없는 세계입니다. 그러니 죄짓지 않는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완벽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채점표를 내려놓고 십자가의 용서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잊을 수 없는 장면이 나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 앞에 끌고 왔습니다. 손에는 이미 돌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저울로 여인을 재고 있었습니다. 그 저울 위에서 여인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울질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한마디에 사람들의 손에서 돌이 하나둘 떨어졌습니다. 나이 많은 자로부터 시작해서 모두가 자리를 떠났습니다.
자신의 채점표를 들여다본 순간, 그들도 감히 돌을 던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인이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 한마디가 여인이 평생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습니다. 정죄 받아 마땅한 자리에서 정죄 대신 긍휼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며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음행하지 말라는 거구나. 착하게 살라는 거구나.' 하지만 이렇게 읽는 순간, 우리는 다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자리로 돌아가 버립니다. 여인이 그 후로 완전히 죄 없는 사람이 되었을 리는 없습니다. 다른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인이 진짜 지어서는 안 될 죄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음행이 아니라, 긍휼과 자비를 받은 자로 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자기 기준으로 자신과 남을 재고 정죄하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세계에서 떠나는 진짜 죄였습니다. 마치 큰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잊고 다시 남의 작은 빚을 독촉하러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탕감받은 자리에서 다시 채권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은혜를 배신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뜻밖의 말을 합니다.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 남을 정죄하는 것만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것도 믿음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그 학생은 남을 정죄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가장 가혹한 채점관이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오늘도 부족했다, 나는 왜 이 정도밖에 안 되나' 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을 겸손이라 여기지만, 실은 여전히 자기 기준을 붙들고 그 기준으로 자신을 재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율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내 안에 있는 한, 나는 자신을 정죄하거나 의롭다 하는 저울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기준이 오직 예수님이 될 때, 비로소 나는 나를 옳다고도, 그르다고도 할 자격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남는 것은 오직 하나, 정죄 받아 마땅한 나를 정죄하지 않으신 그 은총뿐입니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제사를 드리고 할례를 행하는 구약 시대의 일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는 크고 작은 채점표를 손에 쥐고 삽니다. 얼마나 경건했는지, 얼마나 헌신했는지,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지를 기준 삼아 자신과 이웃을 재는 그 모든 습관이 율법 아래 있는 삶입니다.
십자가는 그 저울 자체를 없애 버린 사건입니다. 돌을 들었던 손이 하나둘 떨어지듯, 우리 손에 쥔 채점표도 내려놓아야 할 때입니다. 정죄가 없는 세계, 용서와 긍휼이 넘치는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묻고 싶었던 진짜 질문이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율법 아래입니까, 십자가 아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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