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라디아서 4:1~7)
어느 오래된 저택의 주인 노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어렸을 때, 노인은 아들을 엄격한 가정교사와 집사의 손에 맡겼습니다. 가정교사는 매일 아침 아들의 방문을 두드려 기상 시간을 알렸고, 식사 예절을 교정했으며, 공부 시간과 취침 시간을 철저히 관리했습니다. 아들은 그 스케줄을 어기면 가정교사 앞에 불려가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저택의 상속자입니다. 저택도, 그 안의 모든 것도, 언젠가는 다 그의 것이 될 터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가정교사의 눈치를 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그의 현실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이 아이와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둘 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규율을 따르고, 같은 꾸지람을 받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바로 이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것이란, 이 아이가 가정교사 아래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초등학문, 곧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을 주인으로 섬기는 삶을 말합니다. 율법이 하라는 대로 하고, 하지 말라는 대로 멈추는 삶입니다. 율법이 명령하면 따르고, 어기면 죄책감이 몰려오는 삶입니다. 그 삶에는 끝이 없습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켰다는 확신이 오는 날은 결코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부끄러운 과거로만 회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반드시 거쳐야 할 시간이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을 얻은 자라면, 반드시 그 어린 시절, 곧 율법 아래서 종 노릇하던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손들은 약속의 땅이 아닌 애굽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430년을 종으로 살았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약속이 있는데 왜 먼저 노예의 삶이어야 합니까?
하지만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살이를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가나안 땅에 정착했다면,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니 이 땅은 당연히 우리 것이다." 그 땅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자신들의 공로로는 결코 얻을 수 없었음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주어진 것을 소비하며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우상을 섬기는 이방 종교와 다르지 않습니다. 신이 있고, 신에게 무언가를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그 신이 누구인지, 어떤 은혜로 그것을 주셨는지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그들을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스스로는 거기서 나올 수 없는 자들로 있게 하신 것입니다.
십계명의 첫 말씀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율법은 '이것을 지켜서 내 백성답게 살아라'는 주문 이전에, 먼저 '너는 스스로 나올 수 없는 자였다'는 선언입니다.
율법의 기능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깊이 저주 아래 묶여 있는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것.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사다리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낮은 곳에 있는지를 가리키는 거울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저택의 아들은 가정교사 아래 영원히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정한 때가 되면, 아버지는 아들을 해방시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영원히 종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정한 때에 모세를 보내셨고, 그들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은 율법 아래 나셨고, 율법의 저주를 온몸으로 받으셨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율법이 저주라 선언하는 모든 것을 아들이 대신 짊어진 순간, 그리하여 율법 아래 묶여 있던 자들이 속량되었습니다. 더 이상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을 이유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그 영이 우리 안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합니다. 종은 주인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습니다. 아들만이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 부름이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우리가 종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많은 교회가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믿음의 기준으로 세웁니다. 장로, 권사, 안수집사와 같은 직분을 맡으려면 이 항목들을 얼마나 충실히 지켰느냐를 먼저 확인합니다. 설교는 이것을 지키는 것이 신앙인의 의무라고 가르치고,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것이 틀렸다고 하면 당혹스러워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이 가르침이 오랫동안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자리를 잡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위에 할례와 율법의 준수를 얹었습니다. 믿음의 확인을 위해서, 믿음의 증거를 위해서,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서. 그 이유들은 모두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을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려 하느냐"고 강하게 꾸짖었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집에 돌아온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봅시다. "네가 내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라.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방을 청소하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 내가 너를 아들로 인정하겠다." 이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들 됨이란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태어남으로 아들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성실한 행동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 인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더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사는 것은 오히려 종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율법 아래서 하나하나를 지키며 살아가는 종의 삶이 아들의 삶보다 겉으로는 더 진지하고 충실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아버지가 종을 아들로, 아들을 종으로 바꾸는 일은 없습니다.
사탄이 예수님께 한 유혹을 기억하십니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그가 너를 지켜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됨을,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움직이게 만드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이 사탄의 논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사실은 나를 위험에서 지켜주고 내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로 하나님을 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 됨을 확인하는 것은 행함이 아닙니다. 율법이 선언한 저주 아래 있던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속량하시고, 아들이라 불러주시고, 아들의 영을 마음에 부어주신 그 은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볼 때 나오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가 믿음의 열매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느냐에 시선을 두는 것이 아들의 삶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을 다해 말씀을 지킨다 해도, 그것은 아들이라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아들 됨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종이 아닌 아들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종이 아닙니다. 아들입니다. 그 아들 됨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유업 또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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