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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18) - 나무에 달린 자, 십자가의 참된 의미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3. 5.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라디아서 3:13~14)

어느 날 오래된 교회 건물 앞을 지나다가 문득 걸음을 멈춘 적이 있었습니다. 출입문 위에 십자가가 걸려 있었는데, 세월에 바래고 먼지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얼마나 오래 바라보았을까? 그리고 그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본 것일까?

십자가를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그 죽음으로 우리가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소중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 십자가 신앙은 거기서 멈춥니다. 죄 용서와 구원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한 다음, 십자가는 이미 사용된 티켓처럼 서랍 속에 고이 접어 넣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십자가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믿음이 건강과 행복과 성공의 열쇠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십자가를 외치면서도 신앙생활을 잘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라는 계산을 마음 한켠에 품습니다. 이것은 모순이지만, 당사자는 모순인 줄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자기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공부한 한 청년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께 찾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은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고, 청년은 서슴없이 대답했습니다. "그것들은 다 지켰습니다." 아마 그는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새벽마다 기도하고, 십일조를 빠뜨리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며, 이웃에게 친절하게 대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자랑스러운 신앙의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청년의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는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제자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답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제자들이 받은 충격입니다. 그들은 청년을 보면서 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겠구나라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겠다는 절망 앞에 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신 깨달음이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 아무리 열심히 지키고 실천해도, 그 길의 끝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 신명기 21장은 이런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죽을 죄를 범한 자를 죽여 나무에 달 경우, 그 시체를 밤새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해야 한다고 명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단순히 형벌 절차를 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실상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죽을 죄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지킨 사람이 있습니까? 나무 아래 서서 달려 있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나는 저 자리에 해당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만들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말처럼, 율법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주받은 자임을 보여주기 위한 거울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왜 하필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피 흘려 죽는 방법은 많습니다. 돌에 맞을 수도, 칼에 찔릴 수도 있습니다. 죄 없는 분이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받는다면, 굳이 십자가여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예수님이 십자가, 곧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것은 신명기의 그 말씀을 몸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무에 달린 저주받은 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는 그 현실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그것은 연극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저주받으셨습니다. 실제로 버림받으셨습니다.

왜 그러셔야 했습니까?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달린 저주, 하나님께 버림받은 그 자리가 본래 우리의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단순히 우리 죄를 처리해 주는 기계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거울입니다. 그 앞에 서면 우리 자신이 보입니다. 저주받아 죽어야 할 자, 하나님께 버림받아야 할 자, 그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낍니다.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닌데,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데, 왜 저주받은 자라고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한 가지 비유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빚을 지고 있습니다.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빚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가 그 빚을 전부 대신 갚아 주었습니다. 완전한 자유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음 날부터 다시 이자라도 갚겠다며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면 어떻습니까? 그것은 겸손한 것이 아닙니다. 빚을 대신 갚아 준 사람의 행위를 사실상 부정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희생만으로는 부족하니 나도 보태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완전히 속량하셨는데, 다시 율법을 지켜서 의를 이루겠다는 것은 그 속량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어리석도다"라고 탄식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들은 십자가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서 있느냐입니다. 어둠 속에서는 빛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빛이 임하면, 어둠은 그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빛이 어둠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빛 안에서 어둠은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성도는 십자가의 빛 안에서 자신의 어둠, 즉 나무에 달린 저주받은 자라는 실상을 더욱 분명히 보게 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빛으로 오신 분, 그 저주를 대신 짊어지신 분을 바라보고 믿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스스로 빛을 만들어 내는 것, 선한 행실로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십자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고, 십자가에서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14절은 아름다운 결론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쳤습니다. 유대인들이 결코 자격이 없다고 여겼던 이방인들에게, 혈통도, 율법도, 공로도 없는 자들에게, 오직 예수 안에 속했다는 것 하나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논리입니다. 자격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주받은 자에게 임하는 은혜,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께 속해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상속, 그래서 성도는 자기 행위의 부족함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기 행위를 믿음의 증거로 내세우려 할 때, 그는 십자가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의 십자가 앞으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나의 죄를 처리해 주는 수단을 보았습니까?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보았습니까? 아니면, 나무에 달려 저주받으신 그분 안에서 나의 실상을 보았습니까?

십자가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받아야 할 저주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말합니다. 그 저주를 내가 받았습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볼 때, 비로소 십자가는 살아 있는 신앙의 중심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보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공로를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공로가 오직 주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 그것이 우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나무에 달리신 분.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이고, 이것이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