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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17) - 저주 아래에서 은혜 안으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27.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라디아서 3:10~12)

어느 날 한 남자가 오랫동안 다니던 헬스장을 그만두었습니다.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거기 가면 항상 저보다 잘생기고 근육도 더 좋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 옆에 서면 제가 얼마나 운동을 열심히 했는지는 아무 의미가 없어지더라고요."

그의 말은 웃음을 자아냈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얼마나 끊임없이 비교와 기준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측정하려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어떤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갔는지로 자신과 타인을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 습성은 신앙의 영역에서도 예외 없이 작동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핵심에는 바로 이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 기독교인들은 믿음과 율법의 행위가 만날 때 비로소 의가 완성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듣기에 그럴듯한 주장입니다.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니 행위로 그것을 완성하라는 논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합니다. 믿음과 율법의 행위는 함께 갈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 논쟁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우리의 발이 어떤 땅을 밟고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이 문장의 핵심은 '모든''항상'이라는 두 단어입니다. 율법은 어느 정도의 이행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준수를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율법은 전부를, 언제나 요구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안식일을 생각해 봅시다. 많은 사람들은 안식일을 일정 시간 동안 몸을 쉬게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육체적 노동을 삼가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 안식일을 지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이 요구하는 것은 완전한 쉼입니다.

몸이 소파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마음은 쉬지 않습니다. 내일 해야 할 일을 계획하고, 이웃의 새 차를 흘끗 바라보며 부러워하고,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조급해합니다. 탐욕은 눈을 감아도 잠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 단 하루라도 완전한 안식일을 지킨 사람이 있을까요?

율법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저주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합니다. 마치 엑스레이가 우리 몸속의 골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러진 뼈를 보여주듯이 말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는 한 부유한 청년이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묻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드러냅니다. 그는 영생을 '얻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받는 것이 아니라 성취하는 것으로, 은혜가 아니라 거래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명들을 이야기하자 청년은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이것들은 다 지켰나이다." 어쩌면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율법을 잘 지켜왔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이웃을 도왔고, 부모를 공경했으며, 살인도 간음도 하지 않았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한 가지를 더 요청합니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와서 당신을 따르라고 말합니다. 그 순간 청년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웁니다. 그리고 그는 돌아섭니다. 그 돌아섬은 단순히 재물이 많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더 신뢰하고 있었고, 그 신뢰의 정체는 율법을 지킨 자신, 즉 자기 행위였습니다. 그에게 영생은 예수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한 행위에서 오는 것이었기에, 예수님은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 청년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흔히 생각합니다.
'나는 저 청년과 다르다. 나는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잠깐 멈추어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죄를 범했을 때 어떤 마음이 드나요? '이런 내가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오지 않나요? 그 두려움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결국 내 행위의 수준이 구원의 가능성을 좌우한다는 믿음입니다. 선한 행위가 많으면 구원에 가까워지고, 악한 행위가 있으면 구원에서 멀어진다는 무의식적 확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그 청년 사이의 거리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마태복음 26장의 이야기는 또 다른 각도에서 이 진실을 조명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로 향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베드로는 즉각 반발합니다.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허세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의 결심은 선했고, 그의 의도는 순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선한 결심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실제로 부인하기도 전에, 그의 선한 의도 자체를 거부하십니다. 왜일까요? 십자가의 길은 인간의 선한 의지와 굳센 결심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베드로는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선한 결심이 아무리 강해도 육체는 더 강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육체의 실상입니다. 음행과 시기와 분쟁과 분냄이 육체에서 흘러나온다고 말할 때, 그는 유독 악한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처럼 진심으로 주를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도, 육체는 저주의 결과를 피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왜 존재하는 걸까요? 우리를 저주 아래에 가두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율법의 역할은 우리를 다른 곳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깊은 저주 안에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그 저주를 대신 받으신 분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십자가의 의미가 새롭게 드러납니다. 십자가는 흔히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수단으로만 이해됩니다. 물론 그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에서, 십자가는 예수님의 행하심만이 온전히 선하고 의롭다는 것을 선언하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예수님이 대신 하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가 의를 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의를 포기하게 합니다.

이것은 역설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깊은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이 수영을 잘한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구명조끼를 거부합니다. 익사 직전에야 비로소 손을 내밀어 그것을 붙잡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행위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의를 진심으로 붙잡지 않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수영을 전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 절망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십자가를 향해 손을 내밉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저주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참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저주를 대신 지신 그리스도만을 의로 믿는 것, 이 두 가지는 사실 하나입니다. 자신의 저주를 깊이 알수록 십자가의 은혜는 더욱 선명해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0절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몸은 죽었습니다. 죽은 몸에서는 선하고 의로운 행함이 흘러나올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 너머에서 부활하신 주님만 바라보는 것, 그것이 믿음의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서 있나요? 우리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훌륭한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선한 일을 했는지를 헤아리며 그것을 근거로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고 있지는 않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율법의 행위 아래, 저주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참된 성도의 자리는 다릅니다. 그것은 자신의 행위가 아무리 선해 보여도 저주받아 마땅한 몸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와 의를 붙드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겸손하고 낮지만, 동시에 가장 안전하고 자유로운 자리입니다. 율법의 저주가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할 수 없는 자리,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 저주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행위로 의를 쌓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자가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가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