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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20) - 중보자와 율법, 행함을 넘어 믿음으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8.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갈라디아서 3:19~20)

어느 작은 마을에 오래된 다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강 이쪽 편에는 채무자가 살았고, 강 저쪽 편에는 채권자가 살았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해결되지 않은 부채가 있었고, 그 부채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기조차 싫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그 다리 위에 나타나 양편을 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채무자의 말을 듣고 채권자에게 전했고, 채권자의 요구를 듣고 채무자에게 알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
저쪽 편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채무자는 그가 자신을 대변해 준다고 생각했고, 채권자는 그가 자신의 요구를 전달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사람은 어느 한쪽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양편 모두를 위해 다리 위에 서 있었습니다. 이것이 중보자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예수님을 "
우리 편"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분,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 그러므로 중보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해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0절에서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라는 말은, 중보자가 우리 편에만 서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중보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위해서도 일하십니다. 바울이 디모데전서 2장 5절에서 말한 것처럼, 중보자는 "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 계신 분이지, 사람의 진영 안에 서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율법과 믿음에 관한 논쟁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바울이 이 말을 꺼낸 것은 단순한 신학적 설명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갈라디아 교회의 특정한 위기를 향해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 무언가를 덧붙였습니다. 믿음이 진짜임을 증명하려면 율법의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것,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언뜻 들으면 경건하게 들립니다. 심지어 옳게 들립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도 이 말은 여전히 울려 퍼집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러나 바울이 지금 지적하는 행함은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자신의 행함을 믿음의 증거로, 의로움의 증거로 삼으려는 마음입니다.

어느 교회에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매일 새벽기도를 나오고, 헌금을 빠짐없이 하고, 봉사 활동에도 열심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몸이 아파 새벽기도를 나오지 못하고, 형편이 어려워 헌금도 충분하지 않았으며, 봉사도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입니다. 그런데 행함을 믿음의 척도로 삼는 순간, 이 두 사람은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게 됩니다. 한 사람은 "
믿음이 좋은 성도"가 되고, 다른 사람은 "믿음이 부족한 성도"가 됩니다.

그러나 중보자가 두 사람에게 베푸신 것은 동일합니다. 십자가의 의는 열심 있는 자에게 조금 더, 게으른 자에게 조금 덜 주어지지 않습니다. 중보자의 의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부어졌습니다. 행함의 많고 적음은 그 의의 무게를 조금도 바꾸지 못합니다. 바울이 "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단순한 신학적 상식을 반복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중보자도 한 분이시라면, 그 중보자 안에서 하나 된 사람들도 하나여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행함이 믿음의 기준이 되는 순간, 그 하나 됨은 산산이 부서집니다. 열심이 기준이 되고, 헌신의 정도가 기준이 되며, 눈에 보이는 경건의 분량이 기준이 됩니다. 교회는 하나의 몸이 아니라 등급으로 나뉜 집단이 됩니다.

에베소서 4장 3~4절은 말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시는 방식은 각자의 행함을 인정하고 칭찬함으로써가 아닙니다. 성령은 각자가 자기 자신을 부인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십니다. 자기 자신이 높아지는 곳에 하나 됨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솔직하게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무언가를 실천했다고 느낄 때, 그것을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나쁜 마음이 아닙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운 마음이 신앙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면 문제가 생깁니다.
"나는 이만큼 행했으니 하나님도 나를 더 가까이 여기실 것이다. 예수님도 믿음이 좋은 나에게 더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 이 생각이 들어오는 순간, 중보자 예수님은 우리의 행함을 보상해 주는 분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나의 행함을 하나님께 보고하는 대리인처럼 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진짜 성도의 모습은 다릅니다. 성도는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불의하고 저주 아래 있던 자를 의롭게 하신 십자가의 피의 능력을 증거하는 자입니다. 내가 얼마나 잘 살았는가가 아니라, 그분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가를 가리키는 자입니다.

중보자는 다리 위에 서 계십니다. 우리 편에만 서서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그 간격을 자신의 몸으로 채우셨습니다. 그 일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우리의 행함으로 보완할 것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아는 자만이, 행함으로 자신을 증명하려는 수고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