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갈라디아서 3:23~25)
어린 시절, 우리는 누구나 처음으로 학교에 입학하던 날을 기억합니다. 낯선 교실, 낯선 냄새, 그리고 칠판 앞에 서 있던 선생님, 그 선생님은 우리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었고, 숫자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분 덕분에 우리는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더 높은 학문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교수님의 강의실에 앉아서도, 여전히 초등학교 선생님께 손을 들고 질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초등교사의 역할은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하는 것이었고, 그 인도가 완성되는 순간 우리는 그분의 교실을 졸업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율법을 가리켜 "초등교사"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 의미입니다.
성경을 처음 펼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성경을 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성경이 자신을 읽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20세기 초, 영국의 탐험가 한 사람이 아프리카 오지에서 고대 부족의 언어로 된 문서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 언어를 어느 정도 안다고 확신하며 번역을 시도했습니다. 몇 달에 걸쳐 완성된 번역본을 원주민 장로에게 보여주자, 노인은 오래 침묵하다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말이 아닙니다. 당신 말입니다." 탐험가는 문서의 단어들을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세계 안에서만 해석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아담 이후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본능적인 틀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틀은 마치 색안경처럼 우리 눈에 고정되어 있어서, 성경을 읽을 때도 그 안경을 통해 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우리 자신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요한계시록 22장이 경고하는 대로입니다. 말씀에 더하거나 제하는 일, 즉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뜻으로 채워진 또 다른 복음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어느 목사가 쓴 글을 읽었습니다. 그는 다른 목사가 "기독교 윤리는 그저 교양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것에 강하게 반박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율법도 사랑이고 성령도 사랑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윤리적인 사람이 되게 하신다."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논리도 있고, 성경 구절도 있고, 무엇보다 그 글에는 선한 의도가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이 문제입니다.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지도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지도는 그림도 아름답고 설명도 풍부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목적지가 틀려 있습니다. 그 지도를 따라 열심히 걷는 사람은 결국 엉뚱한 곳에 도착합니다. 지도의 품질이 문제가 아니라 방향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 목사의 글이 그러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윤리적인 사람으로 만든다는 주장은, 그 방향의 끝에 이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어도 된다는 결론으로 향합니다. 성령이 와서 율법을 성취하게 해주신다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선한 포장지 안에 담긴 다른 복음,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서 내내 싸운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을 초등교사라고 부른 것은 율법의 수준이 낮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초등교사가 필요한 것은 학생이 아직 어리고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자신이 글을 이미 안다고 확신했습니다. 자기 이름 세 글자를 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받아쓰기를 시키면 "이 정도는 알아요"라고 말하며 공책을 덮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지를 먼저 아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역할은 지식을 전달하기 전에 먼저 무지를 깨우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이 정확히 그 역할을 합니다. 인간은 본래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제법 선하게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선을 행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율법은 그 확신 앞에 거울을 들이댑니다. 그 거울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죄 아래 갇혀 있는 존재인지를 보게 됩니다. 율법은 의롭게 해주는 도구가 아니라, 의롭게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진단서입니다.
위대한 화학자 마리 퀴리는 방사능을 연구하기 위해 평생 실험실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 실험실 덕분에 그녀는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했고, 과학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발견이 끝난 후에도 계속 낡은 실험실에만 머물러 있어야 했을까요? 실험실은 발견을 위한 공간이지, 발견 후에도 영원히 갇혀 있어야 할 감옥이 아닙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면, 그 인도는 완성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이미 목적지에 도착했음에도 여전히 지도만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 지도 자체를 목적지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으면서도 율법의 행함을 믿음의 증거로 요구하는 교사들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 혼란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초등교사의 교실로 돌아가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두고 "다른 복음"이라고, 저주를 자초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입니다.
야고보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얼핏 모순처럼 들립니다. 율법이 어떻게 자유롭게 합니까? 그런데 이것이 바울의 말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율법이 초등교사로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했고, 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행함으로 의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벗어남이 자유입니다. 율법의 온전함이란 율법 자체가 목적지가 아니라,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그리스도께로의 안내를 완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복음을 들은 사람은 어떻게 살게 됩니까? 누군가는 반문합니다. "행함을 요구하지 않으면 방종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그 대답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직접 보여줍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누구보다 많이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의 동력은 의무가 아니라 은혜였습니다. 율법의 강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윤리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가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그 은혜에 붙들린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것, 그것이 세상의 윤리와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열매입니다.
율법이 초등교사라는 말은 우리가 초등학생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행함으로 의를 세우려는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다가 문득 그 손가락이 나를 향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나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거울로서, 나의 행함이 아무것도 아님을 드러내는 진단서로서, 그리하여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우리를 이끄는 초등교사로서, 초등교사의 손을 따라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십시오. 그 교실의 끝에는 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 문을 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십니다. 율법의 역할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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