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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 아들의 영,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에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5. 27.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라디아서 4:6~7)

1943년 겨울, 네덜란드 하를렘의 한 시계방 지하에는 유대인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코리 텐 붐과 그녀의 가족이 목숨을 걸고 그들을 숨겨주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 코리의 아버지 카스퍼 텐 붐은 숨어 있는 유대인 아이들과 함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이들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그는 화려한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다만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
아버지,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기도가 아이들의 떨림을 잠재웠습니다. 코리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그저 아버지께 돌아간 것이었다." '아빠 아버지'라는 말은 참으로 단순합니다. 그러나 그 단순한 말이 어디서 나오는가에 따라, 그것은 전혀 다른 고백이 됩니다.

1세기 유대인들은 자신들과 하나님의 관계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 확신의 근거는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한, 하나님은 자신들 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가 따로 필요할 리 없었습니다. 다윗의 영광을 회복시켜줄 정치적 메시아는 기다렸지만,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대신 죽어줄 그리스도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화목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했습니다(빌 3:6).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뒤 모든 것이 뒤집혔습니다. 그는 훗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빌 3:8~9) '고상하다'는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을 능가하는 가치를 뜻합니다. 바울에게 그것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말하고 십자가를 언급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예수를 아는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이 위대한 음악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보십시오. "
그 사람, 알죠. 피아노 치는 사람이잖아요."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그 음악가를 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그의 음악이 어떤 고통과 헌신에서 나왔는지, 그의 삶 전체가 음표 하나하나에 어떻게 녹아 있는지를 모른다면, 그는 이름만 아는 것입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는지, 그 죽음이 인간의 어떤 실상을 전제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름만 아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은 우선 인간을 죄로 인해 죽은 자로 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바로 인간의 죄 때문이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씁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24)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을 많은 사람들은 '죄를 이기는 자가 되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제 죄를 이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의 삯인 사망과 관계없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
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었다는 것도, 이제 의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의와 거룩과 영원한 생명의 권세에 연합되었다는 뜻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빚더미에 눌려 모든 것을 잃을 처지에 놓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의 빚을 전부 대신 갚아주었습니다. 이제 그는 빚과 관계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갑자기 재정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의 성품이 바뀐 것도 아닙니다. 다만 빚의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정확히 이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자유를 '
이제 스스로 잘 살아야 할 책임'으로 이해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의를 행하고, 성도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서 내내 싸우는 어리석음입니다. 예수님께 연합된 사람이 다시 자기 힘으로 율법을 완성하려 한다면, 그는 사실상 예수님의 죽음이 불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
그러면 성령은 왜 오셨습니까? 우리를 강하게 하여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도록 돕기 위해 오신 것 아닙니까?" 이것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장 널리 퍼진 성령 이해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능력 있는 신앙인이 된다, 죄를 이길 수 있다, 담대해진다, 기적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이해는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심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성령은 책망하러 오셨습니다. 강하게 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무능한지를 직면하게 하러 오셨습니다. 성령의 책망 앞에 선 사람은 자신을 죽은 자로 봅니다. 그리고 죽은 자로 자신을 보는 사람이 어떻게 '내가 율법을 행하겠다', '내가 의를 나타내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 신학자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유일한 정직한 자세는 두 손을 내려놓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 자세에 이르게 하십니다. 여전히 두 손을 쥐고 무언가를 이루어 하나님께 드리려 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책망이 아직 닿지 않은 증거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은 말합니다. "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성령을 '아들의 영'이라 부르는 것은, 이 영이 아들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의 그 마음입니다. 아들의 영을 받는다는 것은 그 마음에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의 영이 없는 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는 어떨까요? 그 부름의 내면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대부분 도움의 요청입니다.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사랑을 이용하여, 나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의 소원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이 경우 하나님은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됩니다.

한 부유한 사업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사업이 기울고 빚이 쌓이자 오랜만에 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반갑게 맞이했지만, 아들의 눈에는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없었습니다. 오직 도움이 필요했을 뿐이었습니다. 이런 자식이 아버지를 '
아버지'라 부를 때, 그 말에 담긴 것은 관계가 아니라 거래입니다.
아들의 영이 없는 자가 하나님께 아버지라 할 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신이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면 관계가 좋아지고, 허물이 생기면 관계가 손상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늘 불안합니다. 이것이 로마서 8장이 말하는 '
무서워하는 종의 영'입니다. 겉으로는 아버지를 부르지만, 내면은 심판을 두려워하는 종의 심리로 가득합니다.

로마서 8장 15절은 선언합니다. "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의 참된 아들은 예수님이십니다. 성도는 예수님과의 연합 안에서 양자가 됩니다.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은, 아들이 될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아들로 칭함을 받게 되었는지 그 전모에 눈을 뜬 것입니다.

눈을 뜬 사람은 압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자신이 동원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 인식이 자유를 가져옵니다.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확보해야 한다는 불안도, 허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길 것 같다는 두려움도, 이 인식 앞에서는 힘을 잃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영은 내면에서 끊임없이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합니다. '
너는 너의 행복과 안위와 영광을 내려놓고 십자가의 길로 갈 수 있느냐?'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쉽게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무능과 연약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아들의 영이 역사하는 증거입니다. 스스로 갈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은, 아직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의 무능을 알고 두 손을 내려놓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예수님이 하신 일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증거하는 자가 됩니다.

코리 텐 붐은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뒤 평생 전 세계를 다니며 한 가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상처보다 더 깊으십니다." 그녀는 수용소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언니 베치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도움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 고통 한가운데서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영을 받은 자가 드리는 '
아빠 아버지'는 이런 고백입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이 아니라, 사랑받은 자가 사랑하는 분께 돌아가는 고백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신 뜻이 내게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증인으로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을 위해 아들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아들의 영을 받은 자는 오직 한 가지,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합니다. 그것이 그가 드릴 수 있는 가장 깊은 '
아빠 아버지'입니다. 그 기도는 요청이 아닙니다. 그것은 귀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