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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

갈라디아서 -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22.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라디아서 2:11~14)

우리는 바울을 존경합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고백할 때, 그 고백의 순수함과 단단함 앞에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맞다. 신앙은 저래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조용히 한 발짝 물러섭니다. “그래도 바울처럼 살 수는 없지.” 바울은 결혼하지 않았고, 가정이 없었습니다. 그는 천막을 만들며 생계를 유지했고, 복음을 위해 이동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가정이 있고, 책임이 있고, 아이가 있고, 직장이 있고, 노후를 준비해야 합니다.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버겁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의 믿음은 존경하지만, 그의 삶은 현실과 동떨어진 특별한 경우로 밀어둡니다. 그리고 이렇게 정리합니다.
“나는 바울처럼 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신앙은 지킬 수 있다.” 그 지점에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성과를 고민하고, 비교하며 살고, 인정받고 싶어 하고, 손해 보지 않으려 애쓰고, 불안해하고, 때로는 남을 깎아내려서라도 나를 지키려 합니다.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지만, 월요일이 되면 십자가는 서랍 속에 들어갑니다. 이때 마음속에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럼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내 일상에서 무엇으로 드러나야 하는 걸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착하게 살면 된다.” “윤리적으로 살면 된다.” “남들보다 조금 더 바르게 살면 된다.” 하지만 착한 사람은 교회 밖에도 많습니다. 양심적인 사람, 헌신적인 사람, 이타적인 사람은 신자가 아니어도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무엇을 더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갈라디아서 2장에서 바울은 아주 불편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 베드로(게바)를 공개적으로 책망하는 장면입니다. 안디옥에서 베드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적으로 전혀 문제없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 자신이 이미 환상을 통해, 그리고 고넬료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방인도 차별 없이 받으신다는 사실을 몸으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유대 그리스도인들, 곧 할례자들이 도착하자 상황이 바뀝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보자 슬그머니 자리를 떠납니다. 그를 따라 다른 유대인들도, 심지어 바나바까지 함께 물러섭니다. 그 순간 바울은 이것을 단순한 예절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은 행동”이라고 규정합니다.

왜 이 일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일까요? 베드로는 복음을 몰라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방인과 함께 먹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는 정죄가 없다는 것, 그럼에도 그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사람의 시선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평가, 그들의 오해, 그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가능성입니다.

그는 복음이 아니라 관계와 평판을 선택했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 연약함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행동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아직 부족하다.” “너희는 여전히 유대인처럼 되어야 한다.” “복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진리를 훼손하는 행위였습니다.

이 장면은 결코 사도들만의 특별한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에도 수없이 반복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직장에서 신앙을 숨기는 순간 교회 안에서는 은혜를 말하지만, 세상 기준으로 성공을 자랑하는 순간 누군가의 실패를 보며
“저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 같다”고 판단하는 순간, 말씀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성과와 능력을 더 신뢰하는 순간, 우리는 베드로처럼 알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 십자가가 무엇인지, 그러나 막상 그 복음이 나의 평판, 나의 안전, 나의 자리를 위협하는 순간, 우리는 슬그머니 자리를 떠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합리화합니다.
“현실적인 판단이야.” “지혜로운 선택이야.” “괜히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바울은 그것을 외식이라고 부릅니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완벽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항상 담대하게 행동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실패자임을 인정하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 없이는 설 수 없는 사람, 나는 사람의 평가 앞에서 쉽게 흔들리는 사람, 나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사람, 이 사실을 숨기지 않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은 잘 살아서 신앙을 증명하는 현장이 아니라, 계속 무너져서 은혜를 확인하는 현장이 됩니다.

실패자의 자리에서 주를 생각하십시오. 바울은 베드로를 끌어내리기 위해 책망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 사이의 서열을 정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는 단지 이것을 분명히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복음 앞에서는 기둥 같은 사도도, 존경받는 지도자도, 결국 모두 실패자입니다. 그리고 그 실패자를 붙드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도 다르지 않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성공한 신앙인의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실패자로서 주님을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오늘도 저는 복음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 고백이 있는 곳, 그 낮아진 자리, 그 실패자의 자리가 복음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