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린도전서 1:26~31)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말할 때 흔히 ‘성화’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성화는 말 그대로 점점 거룩해져 가는 과정입니다. 예수를 믿어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아직 완성된 존재는 아니기에 남은 생애 동안 조금씩 변화되어 가야 한다는 설명은 너무도 익숙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오래될수록 성품이 달라져야 하고, 삶의 모습도 이전과는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성화는 성도가 죽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는 평생의 과제가 됩니다.
아직 부족하고, 아직 죄가 보이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인식은 신앙인의 일상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자기 자신을 점검합니다. “나는 얼마나 변했는가?”, “여전히 이 모습이라면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닐까?”, “성령을 받았다면 왜 아직도 이러는가?” 하지만 여기서 한 번 멈춰 서서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성경이 이런 방식의 성화를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정말 하나님은 우리에게 “조금씩 더 나아진 모습”을 요구하고 계신가?
만약 성화가 죽을 때까지 진행되어야 할 점진적인 변화라면, 성도는 살아 있는 동안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언제나 부족하고, 언제나 모자라고, 언제나 죄를 발견해야만 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완성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이 오래될수록 평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예민해지고, 더 조급해지고, 더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지 않는 목표를 스스로 만들어 놓고,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을 정죄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성경은 성도에게 “완성된 상태”를 요구하는가 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성도가 어떤 수준에 이르러야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너희는 점점 더 나아져야 한다”는 식의 요구를 명령으로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이 질문은 고린도 교회를 생각할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고린도 교회는 분쟁과 분파로 가득했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는 말이 교회 안을 가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신앙적으로 미성숙하고, 성화가 절실히 필요한 공동체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어떻게 부르는가? 그는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 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아직 덜 된 교회’, ‘성화가 부족한 교회’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께 속한 교회로 선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성경은 문제 없는 교회만을 거룩하다고 부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투성이인 교회를 향해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있다’는 표현을 너무 쉽게 사용합니다. 마치 신앙의 교리 중 하나처럼, 혹은 추상적인 개념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이 말은 결코 가벼운 표현이 아닙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 이 말은 성도의 상태를 설명하는 선언입니다. 성도는 자기 안에서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로 규정되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완성입니다. 부족함이 없고, 더 보탤 것이 없는 분입니다. 그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완성의 세계 안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스스로를 완성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완성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자신을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죄의 모습이 보이고, 연약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보며 “나는 아직 예수 안에 있지 않은가 보다”라고 판단해 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는 점점 희미해지고, 대신 노력이 자리를 차지합니다. 기도, 헌신, 봉사, 성품 개선이 은근히 ‘증명 자료’가 됩니다. 사람들의 평가가 신앙의 척도가 됩니다.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고, 의로움이 되셨고, 거룩함이 되셨고, 구원이 되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그것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그분 안에서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라.” 이 말씀은 인간이 선택과 결단으로 의와 불의를 오가는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갑니다. 의로운 자는 의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의가 드러납니다. 행위가 신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분이 행위를 낳는 것입니다. 성도가 의를 행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착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의는 세상이 말하는 착함이나 성실함으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단순히 입으로 “예수님만 자랑합니다”라고 말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사람은 돈으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권력으로 신앙을 포장하지 않습니다. 자식의 성공으로 믿음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어느 목사에게 속했는가로 자기 정체성을 만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의와 거룩과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잘못된 이유는 예수를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외에 자랑거리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묻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모든 문제가 무의미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긴 편지를 써가며 고린도 교회를 권면한 이유는, 그들이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기에, 그들의 삶과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만 드러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만 반복하는 자기연민이 아닙니다. 또한 “나는 잘하고 있습니다”라는 자기확신도 아닙니다.
신앙은 그리스도만 충분하다는 사실을 삶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란, 우리가 점점 더 나아지는 과정이 아니라 점점 더 그리스도를 자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이 무너지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합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게 될 때, 그 사람은 이미 충분히 ‘거룩한 사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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