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12~13)
사람은 환경을 닮습니다. 사람은 듣는 것을 닮고, 보는 것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부릅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어떤 공동체에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걷게 됩니다. 실제로 어린 시절 숲에서 길을 잃고 늑대 무리 속에서 자란 아이가 늑대처럼 울고, 늑대처럼 걷고, 늑대처럼 사냥하며 살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다른 삶의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보고 들은 것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믿음도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무엇을 듣느냐가 곧 무엇을 믿느냐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닌 다른 소리들 속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말합니다. 더 높아져야 한다고, 더 커져야 산다고, 성공해야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들을 계속 듣다 보면 그것이 신앙이 되고, 그것이 믿음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전혀 다르게 진단합니다. 우리는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타락한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이 타락의 본질은 단순한 도덕적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망입니다. 높아지고 싶고, 드러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아담의 죄였고, 지금도 인간의 가장 깊은 본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장, 승진, 확장, 발전이라는 단어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용합니다. 자녀의 성적이 오르기를 기도하고, 남편의 연봉이 오르기를 바라며, 사업이 확장되기를 축복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이야기들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름으로 포장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요셉처럼 된다.” “믿음이 있으면 다윗처럼 성공한다.” 그런데 정작 성경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은 부르심을 입은 그대로 지내도 된다고 말합니다.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면, 종으로 살아도 되고 결혼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있어도 되고 있는 자는 없는 것처럼 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 말씀을 처음 접하면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성공의 언어가 없습니다. 대신 십자가의 언어만 있습니다. 이미 다 이루어진 구원 안에서, 더 올라가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선포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낯설고, 동시에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성경은 인간을 처음 아담과 마지막 아담, 두 종류로만 나눕니다. 처음 아담은 땅에 속한 자입니다. 흙에서 났고, 썩을 것을 구하며 삽니다. 이 아담은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누군가가 살려주어야 삽니다. 그런데 타락 이후, 그는 살려달라고 울부짖기보다 스스로 높아지려 합니다. 이것이 비극인 것입니다.
반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속한 분입니다. 그분은 살려주는 영입니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처음 아담은 “하나님처럼 되려다” 타락했고, 마지막 아담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낮아지셨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단순한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방향입니다.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려는 인간의 종교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은 늘 논쟁의 중심에 있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말씀을 개인적으로 읽으면 곧 불안이 찾아옵니다. ‘내가 제대로 살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릴까?’ ‘내가 더 순종해야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실까?’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개인의 사적 구원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에서 구원은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구원, 곧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입니다.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위하여 일하십니다. 그 언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내가 천국 티켓을 얻는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불려 들어가는 사건인 것입니다.
몸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지체는 많습니다. 손이 잘났다고 발을 무시할 수 없고, 눈이 밝다고 귀를 경멸할 수 없습니다. 몸 안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것은 건강이 아니라 질병입니다. 세포가 자기만 살겠다고 증식하면 그것은 암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상급 경쟁, 개인 영광, 비교와 질투가 난무하는 공동체는 건강한 몸이 아닙니다.
바울은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림”이란, 내 구원이 취소될까 전전긍긍하는 공포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크고 거룩한 몸의 일부로 부름 받았는지를 아는 경외인 것입니다.
13절은 모든 오해를 종결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구원은 시작도 하나님이 하셨고, 완성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의 순종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시고, 행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네 소원을 다 이루어 주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의 갈망을 우리 안에 심으시고, 그 뜻대로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성도는 방종할 수도 없고, 절망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미 이루어졌기에 함부로 살 수 없고, 하나님이 하시기에 포기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언제나 두려움과 떨림을 동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포가 아니라 거룩 앞에 선 경외였습니다. 마치 아이가 사랑하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깊은 절벽 위를 걸을 때 느끼는 떨림과 같습니다. 떨어질까 봐가 아니라, 그 손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 때문에 떠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것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 이것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삶인 것입니다. 이미 다 이루신 구원 안에서, 자기를 높이지 않고, 자기 욕망을 신앙으로 포장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분과 함께 조용히 걷는 길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안전하고, 가장 자유로운 길입니다.
'신약 말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마태복음 - 지루한 족보에서 시작된 복음 (1) | 2026.01.28 |
|---|---|
| 요한일서 - 나에게 복음은 무엇인가 (0) | 2026.01.27 |
| 고린도전서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무엇을 더 증명해야 하는가 (0) | 2026.01.25 |
| 갈라디아서 -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 (0) | 2026.01.22 |
| 에베소서 - 예수 안에서 (1) | 2026.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