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갈라디아서 2:6~10)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거의 본능적으로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말투는 어떤지, 표정은 부드러운지, 행동은 단정한지, 그리고 그 사람의 과거는 어떤지까지 자연스럽게 살핍니다. 특별히 신앙의 영역에서는 이 평가가 더 엄격해집니다. 교회에서 오래 봉사한 사람, 말이 조리 있고 인품이 온화한 사람,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그를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쉽게 말합니다. 반대로 말이 거칠거나 성격이 직선적이고, 과거에 흠이 있는 사람에게는 무의식적으로 거리감을 둡니다.
어느 교회에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오래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 재정과 운영을 맡아온 장로였고, 다른 한 사람은 과거에 방황하다가 뒤늦게 교회에 나온 새 신자였습니다. 장로의 말에는 늘 무게가 실렸고, 새 신자의 말은 종종 가볍게 흘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드러난 것은, 장로의 확신 속에는 자기 의가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고, 새 신자의 고백 속에는 오직 십자가만 붙드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마주한 상황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사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기에 너무 불편한 과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했고, 성도들을 잡아 가두던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곁에서 보았고, 교회 안에서 ‘기둥’처럼 여겨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비교의 틀을 단호하게 깨뜨립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인품을 들지 않습니다. 사역의 성과를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를 말합니다. 누가 역사하셨는가입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신 분과 자신에게 역사하신 분이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사실, 그 하나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명은 같아도 사람은 다르다.” 그래서 더 존경받아야 할 사역자, 더 신뢰할 만한 신자,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바울의 시선은 다릅니다.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는 역할만 다를 뿐, 가치와 지위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 자체가 사람을 차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할례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과거만 문제 삼을 수 있을까요. 바울이 교회를 핍박한 죄인이라면, 예루살렘 교회 또한 예수님을 죽인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복음 앞에서는 모두가 동일하게 죄인이며, 동일하게 은혜로만 서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사람을 나눕니다. “저 사람은 신앙이 깊다”, “저 사람은 아직 멀었다”, “저 사람은 교회의 기둥이다.” 십자가 앞에 서면 모두 무의미해져야 할 말들이지만, 현실의 교회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용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말합니다.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곧 영광을 받을 자리를 예수님이 아닌 사람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영광의 주라는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높임을 받으셔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근히 사람을 높이고, 사람을 신뢰하며, 사람에게 기대를 겁니다. 교회가 십자가가 아니라 사람을 바라볼 때, 기둥 같은 사람은 생기고, 주변부로 밀려나는 사람도 생깁니다.
바울과 예루살렘 사도들이 나눈 ‘친교의 악수’는 단순한 예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동일하게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음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오른손을 맞잡는다는 것은 “우리는 같은 주님의 손 아래 있다”는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악수를 통해 자신이 인정받았다는 사실보다, 사도라는 직분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함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솔직히 말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업적을 보고, 성격을 보고, 관계의 친밀도를 보고 판단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조적 한계입니다.
바울은 이 한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대신 방향을 바꿉니다. 사람을 보지 말고, 십자가를 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바울과 강도가 다르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이방인도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아담 안에서 정죄받은 존재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안에서만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사실을 붙드는 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철저히 은혜에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믿음 위에 서 있을 때, 교회에는 주인공이 없습니다. 기둥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공동체만 있을 뿐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사도와 사도 사이에 우열이 없는 이유는, 모두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만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또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시선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믿는 자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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