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갈라디아서 4:29~31)
한 회사에 유난히 성실한 사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침마다 누구보다 일찍 출근했고, 밤마다 가장 늦게 퇴근했습니다. 상사가 지나갈 때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었습니다. '오늘은 실수하지 않았을까. 부장님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실까.' 그의 하루는 늘 이 질문으로 시작해서 이 질문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인사 서류를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몇 달 전 결재된 그의 승진 발령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애를 쓰기 전부터, 그가 밤늦게까지 남아 있기 전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던 일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순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물론 그는 여전히 성실하게 일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마음으로 일하게 됩니다. 더 이상 승진을 얻어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누리며 걷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의 노동은 같지만, 그의 존재 방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나눌 갈라디아서 4장 29절부터 31절의 내용과 정확히 같은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여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과, 약속을 따라 사라에게서 난 이삭, 이 두 사람은 둘 다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지만, 그 존재의 근거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스마엘은 인간의 계획과 노력으로 태어났고,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났습니다.
바울이 이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 율법으로, 즉 자기 노력과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서려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열심과 순종으로 그 믿음을 증명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마음속에는 언제나 이스마엘의 본능이 살아 있습니다.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어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닙니다. '내가 기도를 얼마나 했는가, 내가 얼마나 죄와 싸워 이겼는가, 내가 얼마나 선한 일을 했는가.' 이런 것들로 자신이 좋은 성도인지 아닌지를 저울질합니다.
이것을 흔히 '자유의지'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으니, 이제 그 은혜의 힘으로 내 의지를 발휘해서 죄를 이기고 선을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얼핏 보면 매우 신앙적으로 들립니다. 은혜도 인정하고, 노력도 인정하는 균형 잡힌 태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아주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이것은 신앙이 부족한 사람의 고백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 그 누구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다면, 우리의 자유의지라는 것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 한 가지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는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땀을 흘리며 최선을 다해 달립니다. 속도를 높이고, 시간을 늘리고, 매일 더 열심히 뜁니다. 그런데 아무리 달려도 그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발밑의 벨트가 계속 그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지로 선을 행하여 하나님 앞에 인정받으려는 삶이 꼭 이와 같습니다. 열심을 낼수록 지치고, 지칠수록 자신을 더 몰아붙이지만 결국 제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이 길로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자기 힘으로 의로워지는 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성령을 따라 난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정반대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는 자기 자신을 근거로 삼습니다. 자신이 이룬 것, 자신이 지켜낸 것으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그것이 부족하면 불안해합니다.
반면 성령을 따라 난 자는 구원의 근거를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둡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흘리신 피, 그 용서의 능력이 자신을 거룩하게 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못해서', '내가 부족해서'라는 자책에 매이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자신의 잘함으로 얻은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사원처럼, 이미 결정된 것을 뒤늦게 발견한 사람의 마음과 같습니다. 그는 더 이상 증명하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이미 받은 것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선과 악 중에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런 자유는 사실 인간에게 없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나를 그리스도께서 이미 용서하셨다는 사실 안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내가 잘하고 못하는 것에 더 이상 매이지 않는 상태, 그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가 우리 마음에 쉽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여전히 타인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믿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유롭게 사는 것보다, 열심히 노력해서 인정받는 쪽을 더 좋아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한 가정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조건 없이 사랑합니다. 성적이 좋든 나쁘든, 말을 잘 듣든 그렇지 않든 그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이상하게도 계속 부모의 눈치를 봅니다. '내가 이번에 시험을 못 보면 부모님이 실망하시지 않을까. 내가 더 잘해야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부모는 이미 조건 없이 사랑한다고 수없이 말했지만, 아이는 그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노력으로 그 사랑을 지켜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아이의 마음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갖는 마음과 비슷합니다. 은혜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내 행위로 그 은혜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바울은 놀라운 말을 덧붙입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성령을 따라 난 자, 즉 은혜로만 사는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심지어 신앙의 이름으로 열심을 강조하는 사람들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하고 배척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자기 노력으로 무언가를 이루어야 가치 있다고 믿는 세상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미 용납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오히려 게으르거나 무책임한 사람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것이 오히려 참된 자녀 됨의 표지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8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승진 발령을 받은 사원의 이야기에서 그 사원은 승진이 이미 결정되었다는 것을 안 뒤에도 여전히 일을 합니다. 하지만 그 일의 성격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얻어내기 위한' 수고였다면, 이제는 '이미 받은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답'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와 싸우고, 여전히 선한 일에 힘쓰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 됨을 '얻어내기 위한' 몸부림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바 되어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위에서,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우리에게 거절이나 조건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예'가 되어 있는 약속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완전히 이 자유 안에 안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전히 '내가 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마음 한구석에서 올라올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에게 성령이 하시는 일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공로라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 자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종의 아들로 살 것인가,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로 살 것인가? 이것은 우리의 행위의 많고 적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서 있는가, 그것으로 결정됩니다. 우리의 근거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만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신약 말씀 묵상 > 갈라디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갈라디아서 - 약속의 자녀, 잉태하지 못한 자의 노래 (1) | 2026.07.22 |
|---|---|
| 갈라디아서 - 두 어머니, 두 운명 (0) | 2026.07.14 |
| 갈라디아서 - 정죄 없는 세계, 그 낯선 자유 (0) | 2026.07.05 |
| 갈라디아서 - 해산하는 수고 (0) | 2026.06.27 |
| 갈라디아서 - 참된 말이 원수를 만든다 (1) | 2026.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