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자주 TV 화면이나 뉴스 기사 속에서 “잉꼬부부”로 알려졌던 연예인들의 이혼 소식을 접합니다. 대중 앞에서는 손을 잡고 웃으며 완벽한 가정을 연출하던 부부가, 어느 날 서로의 상처를 토로하며 갈라서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오랜 세월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이들이 결혼생활을 마무리하는 장면은, 단순한 연예 뉴스 이상의 파문을 일으킵니다.
이들 부부의 삶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겉으로 드러난 삶과 속사정이 다를 수 있음을, 우리는 과연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그 질문은 비단 연예인이나 유명인사들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겉으로 웃고 속으로는 울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주일 아침, 정갈한 옷차림에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성도들을 보면, 마치 모두가 평안하고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예배당을 나서자마자 그들 중 많은 이들은 현실의 고통과 외로움, 상처의 무게를 다시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가정의 불화, 경제적 곤궁, 정서적 고립, 무너진 인간관계… 이 모든 것을 안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가면을 써야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삶의 이중성은 단지 위선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절박함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웃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고, 겉으로 강해 보이지 않으면 신앙이 부족한 자로 평가받을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들은 이중적인 것이 아니라, 너무나 연약하기에 그렇게 살아내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그녀는 사람들 앞에 나설 수도 없었고, 수많은 의사를 찾아다니며 가진 것을 모두 허비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군중 사이에서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예수님의 옷자락은 마지막 희망이었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란 작은 기대였습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수많은 ‘그 여인’이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말하지 못하고,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조용히 예배당 한 구석에서 옷자락을 만지는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능력을 믿고 싶지만, 응답받지 못한 현실 속에서 어느새 무관심이라는 껍질을 뒤집어씁니다. 신앙은 있지만 열정은 없습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기대는 없습니다. 찬양은 부르지만 마음은 식어갑니다.
우리의 현실은 때때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무리 매달려도 응답이 없고, 기도는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올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새 하나님께 무관심해지고, 신앙은 형식이 되며, 삶은 메마른 사막처럼 변해갑니다. 마치 부자 청년이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지켰나이다”라고 말했지만, 주님의 요구 앞에 근심하며 돌아서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눅18:18~23).
그의 신앙은 열심이었지만, 은혜가 닿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잘 해왔다고 생각했지만, 결정적인 자리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 곁에서 멀어졌고, 주님의 말씀은 제자들의 마음에 큰 질문을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 질문에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그리고 여리고의 삭개오를 통해 그 말씀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삭개오는 스스로를 낮추고, 주님을 맞이하며, 자발적으로 재산의 절반을 나누고, 과거의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열심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이 침묵하신다고 해서 우리가 낙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응답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응답조차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허락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부르짖는 순간마다 곧바로 손을 내미시지 않는 이유는, 때때로 그 침묵 속에서 우리를 더 깊이, 더 간절히 하나님께 이끌어 가시기 위함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은 현실적인 고통 앞에서 믿음을 선택한 신자의 절절한 고백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로 시작되는 탄식 가운데, 그는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우리는 오늘도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어야 합니다. 비록 치유가 더딜지라도, 응답이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옷자락에는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는 우리의 눈물 속에서도 역사하며, 겉은 웃고 속은 우는 우리의 이중적인 삶 속에서 진짜 믿음으로 태어납니다.
신앙은 늘 평탄하고 환한 얼굴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침묵하시는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고통 속에서, 우리 안의 이중성을 깨뜨리는 은혜가 시작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옷자락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순된 신앙의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끝까지 붙들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비록 겉은 웃고 속은 울고 있을지라도, 속사람이 주님을 향해 옷자락을 붙드는 그 손을 주님은 보고 계십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은혜는 오늘도,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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