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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

고린도전서 - 감추어진 지혜, 은밀한 지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7.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린도전서 2:6~8)

사람은 누구나 지혜를 원합니다. 조금이라도 덜 손해 보고, 조금이라도 더 잘 살기 위해 우리는 늘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실패하지 않을까?” 서점에 가 보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겠다는 책들이 끝없이 쌓여 있습니다. 성공의 비결, 행복해지는 방법, 관계를 잘 맺는 기술, 인생을 효율적으로 사는 법, 세상은 이런 지혜를 실용적이라 부르고, 현명하다고 말합니다.

신앙 안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응답받는다.” “이렇게 믿으면 복을 받는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겉으로 보기엔 모두 하나님 이야기 같지만, 중심을 들여다보면 질문은 하나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잘될 수 있을까?’ 바울은 이런 지혜를 단호하게 “세상의 지혜”라고 부릅니다.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분파가 있었고, 도덕적 타락이 있었고, 은사를 둘러싼 다툼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건강한 교회”라고 말하기 어려운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향해 뜻밖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우리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아직 멀었다.” “회개부터 해야 한다.” “제대로 된 교회가 되라.”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온전한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우리는 교회를 볼 때 늘 성과와 상태를 봅니다. 얼마나 질서 있는가, 얼마나 윤리적인가, 얼마나 모범적인가, 그러나 바울은 출처를 봅니다. 그들이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무엇으로 불림을 받았는가, 고린도 교회가 온전한 이유는 그들이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함은 인간의 도달 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마치 갓난아이가 부모의 눈에는
“완전한 내 아들, 내 딸”인 것과 같습니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지만, 존재 자체로 이미 관계 안에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그렇게 보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언제나 분명합니다. 결과가 좋으면 지혜롭고, 결과가 나쁘면 어리석다고 합니다. 회사에서는 성과를 내는 사람이 인정받습니다. 정치에서는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정책이 옳은 정책이 됩니다. 종교 안에서도
“사람이 많이 모이면”, “성공 사례가 나오면” 그것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이런 지혜의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사람이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만족, 사람의 안전, 사람의 행복, 이 모든 것을 잘 관리하고 보장해 주는 것이 지혜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의 지혜를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그 지혜는 이 땅에서만 통용되고, 이 땅이 끝나면 함께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지혜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나타납니다. 그 절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어떤 면에서도 지혜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패배처럼 보이고, 실패처럼 보이고, 무능처럼 보입니다. 만약 세상의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바울의 말처럼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계산법으로는 절대 선택할 수 없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는 사랑이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상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폭로하는 자리입니다. 율법으로 쌓아 올린 의도, 종교적 열심도, 도덕적 자부심도 그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불편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거리낍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미련하게 보입니다.

하나님은 이 지혜를 일부러 감추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지혜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계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잘하면 알 수 있는 지혜가 아닙니다. 경험이 많으면 깨닫는 지혜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눈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끝까지 자기 가능성만을 붙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된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의 고백이 따라옵니다.
“내 힘으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 고백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을 증폭시키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무능을 드러내심으로 영광 받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십자가가 넘쳐납니다. 건물 위에도, 강단 뒤에도, 목걸이에도, 로고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방향이 아니라 장식이 될 때, 교회는 세상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성공을 말하고, 형통을 말하고, 잘되는 길을 말하면서 십자가는 상징으로만 남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결코 중립적인 상징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자랑을 무너뜨리는 사건입니다. 십자가 앞에 서면 우리는 반드시 작아집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만 하나님의 지혜가 들리게 됩니다.

바울은 이 감추어진 지혜가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해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광은 우리가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대단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존재가 아무 조건 없이 용서받았다는 사실, 그 비밀을 증언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증인입니다. 그리고 증인의 역할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 십자가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는 용서가 있습니다. 그 용서가 십자가로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단순한 종교 사건이 아니라, 멸망밖에 없던 인간의 운명을 바꿔 놓은 기적입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오직 그리스도뿐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미련해 보이는 길이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를 알게 된 사람은 오늘도 조용히, 그러나 담대하게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이 생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