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린도전서 1:8~9)
성도는 예수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봉사를 성실히 하고, 말씀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산다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자리, 곧 존재의 자리를 말합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혹은 무엇을 하지 못하든 상관없이 이미 거룩한 성도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를 성도로 만들지 않았고, 우리의 실천이 우리를 의롭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함을 입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안’이라는 세계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쉽게 잊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자신의 신앙을 저울에 올려놓고 달아봅니다. 오늘은 기도를 했는지, 헌신은 충분한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신앙인인지 끊임없이 비교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신앙까지 평가하고 판단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예수 안의 의미를 오해할 때, 신앙은 은혜가 아니라 부담이 되고, 복음은 자유가 아니라 기준이 되어버립니다.
예수 안은 완전한 세계입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더 보태야 할 것도, 고쳐야 할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수리해야 할 결함이 남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 이미 온전히 이루어진 상태의 세계가 예수 안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로 말미암아 완전한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현실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부족하고, 실패하고, 넘어지며 살아갑니다. 스스로를 돌아보면 ‘완전하다’는 말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천국은 어떤 사람이 들어가는 곳인가? 천국은 흠 없고 거룩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그 자격을 갖추게 되는가? 우리의 부족함을 하나씩 채워가며, 어느 날 마침내 완전해졌을 때인가? 만약 그 방식이 가능하다면, 예수님의 오심과 십자가의 죽음은 불필요한 사건이 되고 말 것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천국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열려 있습니다. 천국은 오직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피 안에서 성도가 이미 완전한 자로 선언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부족함을 채우는 여정’이 아니라, 완전한 세계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여정인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안에 산다’는 말을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면 예수 안에 있는 것이고, 신앙생활이 무너지면 예수 안에서 벗어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시선은 다릅니다. 바울은 문제투성이였던 고린도 교회를 향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들의 분열과 혼란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교회, 예수 안에 있는 교회로 선언하며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 감사는 고린도 교회의 신앙 수준에 대한 칭찬이 아닙니다. 바울의 감사는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셨고, 하나님이 은사를 주셨으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인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예수 안에는 정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도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다만 그 죄에 대해 심판받지 않는다는 것이 ‘정죄 없음’의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심판을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만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다면, 죄에 대한 감각은 무뎌지고 말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먼저 은혜를 말한 이유는 죄를 덮어주기 위함도, 그들의 구원을 안심시키기 위함도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 없는 존재로 만들 수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사탄을 제거하실 수 있고, 유혹 없는 세상을 만드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와 유혹이 존재하는 이 세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우리의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알게 된 자들로 하여금, 그 사랑 안에서 함께 기뻐하고 교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예수 안에서의 삶은 개인의 경건 생활이 아니라, 관계의 삶입니다. 주와 더불어 교제하는 삶이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함께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분열을 멈추고 하나 되기를 권한 이유인 것입니다.
성도는 오직 예수 안에 있음으로 견고해집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봉사를 많이 해서, 은사가 뛰어나서 견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견고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을 행위로 재단할 이유도, 다른 사람과 비교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붙들고 싶어 하는 ‘성도다운 가치’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예수 안의 자유가 보입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끝까지 견고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아니라 주가 살게 하신다는 고백이 같은 말이 되고, 같은 마음이 됩니다. 교회는 그렇게 세워집니다.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자들이 모여서가 아니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안에서 하나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함께 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도 드러납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 그것은 이미 완전함으로 부름 받은 자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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