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누가복음 11:13)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던 모습을 제자들이 바라보았습니다. 그분의 기도는 달랐습니다. 단순히 간구의 형식이 아니라, 하늘과 교통하는 깊은 생명의 대화였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요청합니다.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이 간청 속에는 단순히 “기도문을 하나 알려주세요”라는 의미만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이미 기도의 민족이었습니다.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마다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고, 수많은 정형화된 기도문들을 외웠습니다. 그들은 “카디쉬”나 “세모네 에스레(열여덟 번 축복기도)” 같은 기도를 매일 암송하며 신앙의 색깔을 드러냈습니다. 각 종교 집단마다 자신들의 신앙 노선을 대표하는 ‘기도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세네파, 세례 요한의 제자들까지 모두 자신들만의 기도문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요청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님, 우리도 ‘예수를 따르는 무리’로서의 색깔을 가진 기도를 갖고 싶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어떤 길을 걷는 사람인지 ‘기도’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요구를 들으시고 곧바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그리하여 주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주기도문은 단순한 청원문의 나열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의 정체성, 그리고 구원의 완성에 대한 선언이 담겨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우리의 ‘소원 목록’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신앙 고백문입니다.
‘나의 가장 깊은 소원이 나를 정의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간절히 구하느냐가 곧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기도를 드리는가는 곧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주기도문은, “너희는 이런 존재로 살아야 한다. 이런 백성이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즉, 주기도문은 단순한 기도문이 아니라, 성도의 정체성과 소명을 규정하는 신앙고백서입니다.
주기도문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 개인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여정을 노래합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높임받기를 구하는 것이 기도의 첫 문장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내 뜻을 이루어 주시길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이것은 단순히 밥을 구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요 6:51) 하셨듯, 이 양식은 하늘의 만나,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합니다. “주여, 오늘도 내 영혼이 예수로 배부르게 하소서.” 이것이 성도의 진짜 ‘양식 기도’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하나님께 용서받은 자는 반드시 용서하는 자로 살아갑니다. 기도는 복수의 통로가 아니라 화해와 은혜의 통로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 우리의 믿음이 끝까지 하나님의 손 안에서 보호받기를 구하는 간절한 부르짖음입니다.
이 모든 기도의 흐름이 결국 하나의 중심으로 모입니다. 그것은 “양식”,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성도를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신 비유를 볼 차례입니다.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를 “강청기도”의 교훈으로 이해합니다. “끈질기게 구하면 결국 하나님도 응답하신다!” 하지만 이것은 인본주의적인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끈기나 열심에 감동하셔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당신의 뜻에 맞게 바꾸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도는 “내 뜻이 이루어지이다”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로 끝납니다.
기도를 오래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속담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늘은 스스로 돕지 못하는 자를 도우십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늘의 뜻으로 바꾸어 내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조종당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양이나 끈기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자녀의 요구를 맹목적으로 들어주는 부모가 아닙니다. 우리의 부모들도 아이가 떼를 쓴다고 모든 요구를 들어주지 않듯, 하나님도 우리의 영혼에 유익하지 않은 것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나를 이끄는 통로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끈질김의 승리가 아니라, 순복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럼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까요? 11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 내리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결국 주님이 말씀하신 기도의 결론은 ‘성령’입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가장 좋은 것, 하늘 아버지가 주시길 원하시는 최고의 선물은 바로 하나님의 영, 곧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의 기도는 달라집니다. 더 이상 세상의 떡을 구하지 않고, 하늘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게 됩니다. 더 이상 내 뜻을 주장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에 순복하는 자로 변화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동행의 자리’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어내는 거래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머무는 자리, 하나님의 뜻에 내 마음을 맞추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결과보다 관계입니다. 응답보다 교제입니다. 하나님을 움직이기보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변하는 은혜의 과정입니다. 기도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기 전에, 나를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능력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지 않습니다. 하늘은 그 뜻대로 인간을 바꾸어 냅니다.” 이 한 문장이 오늘의 비유 전체를 요약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설득당하는 사건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무릎을 꿇는 이유는 하나님께 떼를 쓰기 위함이 아니라, 그분 앞에서 나를 잃고, 그분의 뜻 안에서 다시 태어나기 위함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성령을 주시리라."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진정한 결론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을 조종하지 않고,하나님께 순종하게 되기를 오늘도 그렇게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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