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 이야기

기독교 - 성령세례 :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시는 분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26.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한복음 16:7~11)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귀는 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만 맞는 말입니다. 마귀는 무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지능적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신앙 때문에 감옥에 끌려가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믿음을 더 깊이 붙들 가능성이 큽니다.

일본의 후미에, 로마의 사자 밥, 북한의 수용소는 교회를 없애기보다 오히려 더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고난은 성도를 각성시키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방향을 바꿉니다. 핍박하지 않습니다. 막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계속 예수 믿으라”고 부추깁니다. 예배도 드리게 하고, 헌금도 하게 하고, 봉사도 하게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게 합니다. 다만 한 가지만 빼앗습니다. 복음의 본질입니다. 십자가는 흐릿해지고, 자기부인은 사라지고, 하나님 나라는 구호만 남게 됩니다.

그 자리에 들어오는 것은
‘나를 잘되게 해주는 하나님’, ‘내 꿈을 응원해주는 예수’, ‘내 열심을 칭찬해주는 신앙’입니다. 그렇게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며, 평생 종교생활을 하고, 마지막 날에 깜짝 놀랍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때 들려오는 대답은 차갑습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열심은 언제든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열심은 언제나 신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열심은 구원의 증거가 아니라 위장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아침부터 정오까지 뛰어다니며 소리쳤습니다. 분위기를 만들고, 흥을 돋우고, 신을 감동시키려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조명을 어둡게 하고, 음악을 키우고, 감정을 끌어올립니다. 사람들이
“좋았다”고 말하면 성공한 예배가 됩니다. 그러나 예배의 기준은 사람의 만족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입니다. 극장에서 느끼는 감동, 콘서트에서 느끼는 전율, 클럽에서 느끼는 흥분을 예배당에서 재현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바알의 제단 곁에서 뛰놀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혹시 신이 잠들었을까 봐” 더 크게 외쳤습니다. 오늘날의 통성기도와 주여 삼창은 어떠합니까? 간절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보여주기식 신앙일 수도 있고, 때로는 하나님을 압박하려는 거래일 수도 있습니다. “이 정도면 하나님도 들어주시겠지.”

그 다음 단계는 자해입니다. 피가 흐르도록 몸을 상하게 하는 고행, 이교에서나 볼 법한 일이지만, 이름만 바뀌어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금식은
“하나님만이 나의 생명입니다”라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만큼 했으니 응답하라”는 협박이 되는 순간,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마귀의 미끼가 되는것입니다.

성령은 기적을 보여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짐승들은 기적을 행합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립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을 흉내 내기 위해서입니다. 사탄은 삼위일체를 흉내 냅니다. 죽었다 살아난 것처럼 보이고, 기적을 동원해 경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적이 있으면 하나님이 계신 것 아니냐”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깨닫게 하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우리는 이미 가장 큰 기적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성령의 첫 번째 사역은 복음을 이해시킵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소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십자가의 의미를 풀어주시고, 부활의 실체를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감정적으로 흥분시키는 분이 아니라, 복음 앞에서 무너뜨리시는 분입니다.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내가 받을 심판이 무엇이었는지, 그런데도 왜 내가 여기 살아 있는지, 그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교만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두 번째 사역은 이 땅에 집착하지 않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세상이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 성을 쌓지 않습니다.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영원한 것처럼 살지 않습니다. 지진이 일어나고, 전쟁이 일어나고, 기근이 반복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여기는 너희 집이 아니다.” 성령은 성도들의 시선을 끊임없이 위로 끌어올리십니다. “너희는 이사 갈 사람들이다.”

성령의 세 번째 사역은 교회를 하나로 묶는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방언 사건은 신비 체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벨탑의 저주가 풀린 사건입니다. 언어가 갈라졌던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하나가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교회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굶는 사람이 없습니다. 외면당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약한 지체가 버려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능력 집단이 아니라 한 몸입니다.

성령은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령을 가볍게 부르면 안 됩니다. 성령을 부려먹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은 요술램프의 지니가 아닙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도구도 아닙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우리를 구원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세례란 어떤 체험이 아니라 눈이 열리는 사건입니다. 보이지 않던 하나님 나라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