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0)
사람은 본능적으로 “내가 한 만큼 받는다”는 말을 신뢰합니다. 공부하면 성적이 오르고, 노력하면 성과가 생기며, 법을 지키면 상을 받는다는 생각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도 우리는 무의식중에 같은 공식을 적용합니다.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지.” “이 정도 했으니 하나님도 내 편이실 거야.”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이런 계산법을 아주 단호하게 무너뜨립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충격적인 선언을 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기대는 순간 이미 저주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왜일까요?
‘대충 잘함’이라는 것은 율법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래도 남들보다는 착하게 살았어.” “큰 죄는 안 지었잖아.” 하지만 율법은 그런 비교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입니다. 야고보는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만 어겨도, 이미 전부를 어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깨끗한 유리컵에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컵의 99%가 깨끗해도, 그 물은 더 이상 마실 수 없습니다. 율법은 “대부분 괜찮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항상, 모든 것을, 완벽하게 요구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인간에게 복으로 가는 사다리가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의 무능을 드러내는 거울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처음부터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셨을까?” 모세 언약의 목적은 인간을 의롭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인간을 절망하게 만드는 데 있었습니다. 율법은 죄를 없애지 않습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냅니다. 율법은 인간을 고치지 않습니다. 율법은 인간이 스스로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정합니다.
마치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는 것과 같습니다. 엑스레이는 병을 치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엑스레이 없이는,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율법은 인간을 살리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살릴 수 있음을 알게 하는 도구였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단순한 사형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도저히 메시아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저주받은 죽음이 우리의 자리를 대신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믿음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보고 감동하는 이유는 우리가 조금 착해서도, 신앙심이 깊어서도 아닙니다. 이미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증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묻습니다. “아브라함은 복을 받지 않았습니까? 소와 양이 많지 않았나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재산은 그의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실수와 두려움의 부산물이었습니다. 그가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을 때, 바로 왕에게서 받은 재물은 하나님의 약속의 핵심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진짜 복은 갈라디아서 3장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약속은 ‘자손들’이 아니라 한 자손, 곧 그리스도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 그리고 그 복이 이방인인 우리에게까지 미치게 된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목적은 그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처소로 삼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제 그 처소는 성전도, 예루살렘도 아닙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성도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이보다 더 빼앗길 수 없는 안전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날 많은 신앙의 언어는 여전히 말합니다. “구원은 은혜지만, 복은 행위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을 반으로 자른 말입니다. 복 자체가 이미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복이 행위라면, 십자가는 불필요해지고 은혜는 조건부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하게 됩니다. 누가 더 헌신했는지, 누가 더 잘되었는지, 누가 더 복받은 것처럼 보이는지,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율법의 끝에서, 인간의 행위가 무너진 자리에서, 오직 한 가지 고백만 남습니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이것이 아브라함의 복이었고, 모세가 율법을 통해 데려가고자 했던 자리이며, 새 언약 백성이 서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 안에 아들이 계시면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은 성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물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성경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중요한 성경적인 가르침 - 세례와 성찬 (0) | 2026.01.28 |
|---|---|
| 중요한 성경적인 가르침 - 직임과 은사의 차이 (1) | 2026.01.28 |
| 기독교 - 성령세례 :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시는 분 (0) | 2026.01.26 |
| 모세의 언약 - 복을 얻으려는 인간, 복이 되신 그리스도 (1) | 2026.01.24 |
| 중요한 성경적인 가르침 - 교회의 양면성 (1) | 2026.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