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로마서 5장 3~5)
어느 목회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 문턱을 드나들었지만, 마음속에는 풀리지 않은 질문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왜 자신이 구원받아야 하는지, 구원받았다는 사람에게서 왜 여전히 죄가 흘러나오는지, 이미 여러 해 동안 다른 종교들을 두루 살펴보았기에 그 한계도 알아버린 뒤였고, 정작 자신이 믿는다는 기독교 신앙의 뿌리마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만약 기독교에도 진리가 없다면, 나는 이 인생을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런 무서운 생각을 품고 잠든 밤,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구름 위 하늘, 흰옷 입으신 예수님이 마치 삼각김밥을 눕혀 놓은 것 같은 꼭짓점 자리에 서 계셨고, 그 뒤로 수많은 천사와 성도들이 흰옷을 입고 우레 같으면서도 한없이 따뜻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들과 함께 밤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이런 눈물 흘리지 않는 내 아버지 기다리시는 그곳에 가자." 잠에서 깨자마자 그는 그 노래를 받아 적었습니다. 가사는 고스란히 그가 그동안 고민하던 내용이었고, 멜로디는 밤새 귀에 울리던 것이었기에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노래 한 곡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날 라디오 생방송에서 그 노래를 불렀을 때, 수많은 사람들의 전화와 편지가 쏟아졌습니다. 지금도 힘이 빠지고 고단한 날이면 그는 기타를 들고 그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그날 밤의 감격이 되살아납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본문, 로마서 5장 3절에서 5절은 얼핏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합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고통 속에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역설을 풀어가는 열쇠가 바로 저 꿈 이야기 속에, 그리고 우리 각자가 살아내고 있는 이 인생이라는 '꿈' 속에 숨어 있습니다.
몇 해 전, 그 목회자는 또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골똘히 묵상하다가 얕은 잠에 빠졌는데, 신기하게도 꿈속에서조차 같은 질문을 계속 붙들고 있었습니다. 마치 욥기 1장을 읽다 잠들었더니 꿈속에서 욥기 2장을 보는 것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잠들기 전 현실에서 고민하던 또 다른 '나'를 마치 남처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꿈에서 깬 뒤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방금 전 꿈속에서 생각하던 그 '나'를 이번엔 현실의 내가 또 남처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진짜 나인가?" 이 순간 떠오른 것이 장자의 유명한 이야기, 호접몽입니다. 장자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훨훨 날아다니는 그 순간, 그는 그저 나비였습니다. 자신이 원래 장자였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로 말입니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보니 나비는 온데간데없고 장자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지금 나비가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봅시다. 만약 장자가 나비 꿈을 꾸다가 "아, 이게 바로 나의 진짜 현실이구나!" 하고 느끼는 그 상태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져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고 죽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는 나비로 죽은 것입니까, 장자로 죽은 것입니까? 무엇이 그의 진짜 현실이었을까요?
우리는 흔히 '지각'인 보고, 만지고, 맛볼 수 있는 것을 현실 판단의 척도로 삼습니다. 그런데 정신질환을 겪는 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는 분명히 보이고, 들리지 않는 소리가 분명히 들립니다. 비록 그것이 환청이고 환시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들에게 엄연한 지각이며 그들의 현실입니다. 다만 다른 다수가 거기 동의해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미쳤다"고 말할 뿐, 그들에게 현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곧, 지각이라는 것이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각 사람의 뇌가 해석해내는 지극히 상대적이고 개별적인 신호라는 뜻입니다. 같은 사건을 겪어도 사람마다 전혀 다르게 지각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자기 지각을 무엇이, 혹은 누가 장악하고 있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주의와 인본주의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요 8:44). 그들의 지각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죄와 마귀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성도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두 부류가 살아가는 현실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하나의 그림이 그려집니다. 묵시(계시) 속에 이미 완료되어 하늘에 존재하는 '나'가 있고, 그 '나'가 지금 이 역사라는 무대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림입니다. 영화감독 박찬욱의 작품 중에 「달은… 해가 꾸는 꿈」이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해가 뜨면 달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아, 이 달은 해가 꾸는 꿈인가 보다" 했다는 데서 따온 제목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집으로 가자"를 함께 부르며 서로를 위해 눈물 흘려주던 그 하늘의 장면이야말로 진짜 현실이고, 지금 이 역사 속에서 하루빨리 그 꿈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사는 우리야말로 실은 꿈속의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영원이 현실이고, 시작과 끝이 있는 이 역사가 오히려 묵시가 꾸는 꿈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만 보존하여 두신 것이라"(벧후 3:7) 깨는 날이 있습니다. 이 역사에서 깨어나는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천상의 교회인 열두 사도,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실체 속으로 그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안에 이미 내가 있습니다. 이렇게 이미 집에 돌아가 있는 '나'와, 지금 이 역사라는 꿈속에서 그 집으로 돌아갈 날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또 다른 '나'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이 기다림에 붙여진 이름이 바로 소망입니다. 꿈에서 점점 깨어날수록 우리는 진짜 현실에 가까워지고, 그럴수록 이 소망은 점점 확실해집니다.
묵시의 세계, 곧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현재'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완료하신 나라이기에, 그곳에는 과거에 대한 미련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신 그 완료 상태가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반면 우리가 사는 시간의 세계, 곧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는 세계입니다.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은 곧 자라남과 성숙, 그리고 필연적으로 후패와 썩어짐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차이를 창세기가 아주 인상적으로 보여줍니다. 에덴동산의 아담은 아기로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완성된 어른으로 창조되었고, 창조되자마자 결혼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힘을 부여받았습니다. 성장이라는 과정이 필요 없는, 완료된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담이 죄를 짓고 에덴 밖으로 나가자마자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가인이라는 '아기'가 태어납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시간이라는 흐름이 시작된 것입니다. 태어나서 자라고, 늙고, 죽는 삶 말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하늘의 왕으로 계시던 분이 이 땅에 내려오실 때, 어른으로 뚝 떨어지지 않으셨습니다. 아기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종말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완료의 나라에서 시간의 나라로 들어오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수님의 생애 그 자체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광주의 한 장애인 학교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끔찍한 사건을 바탕으로 쓴 이 소설은, 안개 낀 도시의 풍경으로 시작합니다. 왜 하필 안개였을까요? 인간은 자신이 들키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 때,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그 안개 속에서, 장애 아동들을 보호해야 할 학교 관계자들이 어린 학생들을 성폭행하고 학대했습니다. 피해 사실이 알려지자 그들은 막대한 재력으로 변호사와 의사, 심지어 피해 학생의 가족들까지 매수해 대부분 무죄나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훗날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져 크게 흥행하면서 사건이 다시 세상에 알려졌고, 온 나라가 분노했습니다. 인터넷은 그 학교와 가해자들을 향한 비난으로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봅시다. 정말 그 학교, 그 안개 낀 도시만이 '도가니'였을까요? 오히려 그 사건 바깥에 서서 "너희 같은 것들 때문에 우리 인간의 존엄이 더럽혀졌다"며 돌을 던지던 이들이야말로 진짜 도가니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것은 "나는 적어도 너 같은 악당은 아니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한 심리학자는 이 사건이 왜 이토록 사회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는지를 연구했는데, 그 결론이 흥미로웠습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분노하는 그 이면에는, 정작 그 은밀한 이야기를 몰래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관음증적 욕망이 자리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을 들키기 싫어서, 남에게서 그것을 발견하면 더 격렬하게 정죄하는 심리,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투사'라고 부릅니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 이 세상 자체가 바로 그 도가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만이 진짜 성도입니다. 자기 자신이 그 안개 속 존재라는 사실을 놓친 채 남을 정죄하는 사람이야말로 실은 도가니 안에 갇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우리가 빨리 깨어나야 할 악몽이 맞습니다.
본문에 보면, "환난은 인내를 낳고…"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환난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환난을 외부에서 오는 고통인 배고픔, 가난, 질병,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환난의 진짜 정체가 보입니다. 밥을 굶은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진짜 정체가 무엇일까요? 정말 배가 고파서 아픈 것일까요, 아니면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과 타인의 시선이 아플까요?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를 하며 스스로 먹을 것을 제한합니다. 그것도 배고픔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몸무게가 0.5kg 줄어든 것을 확인하면 사람들은 기뻐하며 소리칩니다. "야호!" 이걸 누가 환난이라 부르겠습니까?
사업이 망해 생활 규모가 크게 줄어든 사람을 생각해봅시다. 그가 느끼는 고통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요? 집이 좁아져서 잠을 못 자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선교지에 나가면 침낭 하나 깔고 맨바닥에서도 잘 잡니다. 그가 느끼는 고통의 정체는 '망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절망입니다.
이렇게 보면, 환난의 정체는 언제나 '나'입니다. 나의 자아 구축, 나의 자존심, 나의 가치 증명, 이것이 무너질 때 느끼는 아픔이 곧 환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환난을 죄와 연결시킵니다. 도덕과 윤리를 어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로 주시는 것이 환난이 아니라, 자아가 부인되고 해체되는 데서 오는 저항감, 그것이 바로 환난으로 감지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처음 자리는 원래 '없음'이었습니다. 흙으로 지어진 질그릇,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도 없는 그릇이었습니다. 그 없음 안에 하나님의 생명력이 채워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늘의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질그릇이라는 단어 자체가 '흙으로 만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은 우리는 마치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지금의 '있음'을 이루어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시간의 삶이고, 썩어짐의 삶이고,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있음'을 흉내 내는 우리를 다시 '없음'의 자리로 부수어 내려 하십니다. 그런데 그 작업이 아픈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육신을 입고 오감으로 그 죽음의 과정을 생생하게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환난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낳는다"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이해합니다. "고난을 잘 견뎌내면 신앙이 성숙해지고, 더 강인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당신이 지금까지 겪은 시련들이 정말로 당신을 어떤 고통에도 흔들리지 않는 '맷집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었습니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 시련을 통과하며 이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다음엔 이런 일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그러다 또 넘어집니다. 진짜 견딜 수 없는 일이 닥치면, 우리는 여전히 이전과 다름없이 흔들립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인내'란 대체 무엇일까요? 같은 단어가 요한계시록에도 등장합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라"(계 14:12)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4:13) 인내를 말하면서 곧바로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인내란, 어떤 환난이 닥쳐도 "나는 예수 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다"는 그 믿음을 죽는 순간까지 놓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놓치지 않음'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 요한은…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자라"(계 1:9) 예수님의 '참음'이 무엇이었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하고 간구하셨던 그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잔을 거두지 않으시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까지 그를 끌고 가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참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인내란, 내가 이를 악물고 견뎌내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죽지도 못하게 끝까지 붙드시고 목적지까지 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 서머나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 이것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8~10)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실제로는 부유한 교회였습니다. 성도들도 대부분 경제적으로 넉넉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의 "환난과 궁핍"을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겪은 환난과 궁핍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 환난의 정체는 바로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이었습니다.
여기서 '자칭 유대인'이란 특정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노력과 도덕적 성취로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모든 이들, 곧 율법주의적 인본주의를 총칭하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은혜와 십자가만 붙들고 사는 서머나 교회를 향해 조롱하며 물었을 것입니다. "왜 너희는 십자가만 이야기하느냐? 인간이 뭔가 노력하고 성취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이런 조롱과 비난이 서머나 교회가 겪은 진짜 환난이었습니다.
주님의 응답은 명확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이는 끝까지 예수만 믿으라는 뜻이며, 동시에 그들이 앞으로도 계속 고난을 겪을 것이지만 결코 그 믿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나님이 죽는 순간까지 붙들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이 인내입니다.
야고보서는 또 다른 예를 듭니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약 5:11) 욥이 무엇을 참았습니까? 우리는 흔히 욥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견딘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욥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습니다(욥 3:1). 친구들과 논쟁하며 계속해서 항변했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느냐? 나는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적도 없고, 재물을 탐낸 적도 없다. 자식들이 잔치를 벌일 때마다 그 수대로 제사를 드린 사람이 나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느냐?"
그러던 욥에게 마침내 하나님이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의 고통에 대한 설명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 38:4) 몇 장에 걸쳐 창조의 신비를 펼쳐 보이시며,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지금 창조주 행세를 하려고 하는데, 창조주는 나다." 그때 욥이 뭐라고 답했습니까?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6).
이것이 욥의 인내였습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본래 자리,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자리를 올바로 자각하게 될 때까지, 하나님이 그를 붙들고 살려두신 그 과정 전체를 야고보는 '욥의 인내'라고 부른 것입니다.
원래 성도는 환난을 겪을 자격조차 없는 존재입니다. '없음'에 불과한 자가 무슨 환난을 겪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있음'만이 겪을 수 있는 그 환난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은혜입니다. 이 역설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진짜 성도입니다. 그 환난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나와 동행하고 계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내는 다시 '연단'을 낳는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이 '연단'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도키메'인데, 사실 이 단어의 본래 뜻은 '증거'입니다. 흔히 생각하듯 고난을 통해 단단해지고 강인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험의 불을 통과한 뒤에 남는 진짜라는 증거를 뜻합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
금 세공업자가 광석을 뜨거운 도가니에 넣고 녹이는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불순물이 섞인 광석을 불로 확 태우면, 불순물은 다 타서 사라지고 순전한 금만 남습니다. 그 남은 것이 바로 '진짜'라는 증거, 도키메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은 이 원리를 교회에 적용합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1~1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저마다 자기 나름의 공력을 쌓아 올립니다. 금 같은 값진 헌신도 있고, 지푸라기 같은 헛된 노력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불이 임하면, 그 모든 것이 시험대에 오릅니다. 그리고 결국 남는 것은 우리의 공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그리고 그 위에 예수님이 십자가로 지으신 집, 곧 교회뿐입니다.
성경에는 '성전 측량' 사건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겔 40장, 계 11장). 진짜 성전이 하나님이 주신 도면대로 지어졌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계 11:1~2) 마흔두 달, 곧 삼 년 반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역사를 상징하는 기간입니다. 그동안 성전 밖 세상은 그냥 내버려 두어지지만, 성전 안쪽, 곧 진짜 성도들은 이 기간 내내 세상으로부터 짓밟힙니다. 왜 오직 십자가만 붙드느냐고, 왜 은혜만 이야기하느냐고 조롱받는 것이 성도가 겪는 환난의 정체입니다. 그렇게 예수라는 자아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이 부서지고 깨어지면서, 마지막에는 오직 예수의 십자가라는 증거인 도키메만이 남게 됩니다.
히브리서 11장이 소개하는 첫 번째 믿음의 증인이 아벨이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아무 가진 것 없이, '없음'으로 이 땅에 와서 형의 손에 죽은 아벨입니다. 그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바로 성전 측량이었습니다. 열심히 율법과 제사로 자기 의를 쌓아가던 유대인들에게 찾아가 "이것은 진짜가 아니다, 헐어버려라. 내가 삼 일 만에 다시 세우리라" 말씀하셨고,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두 증인이 말씀을 전하다 죽임당한 곳도 예수의 십자가가 세워졌던 바로 그 장소였습니다(계 11:8).
우리는 지금 이 역사라는 무대에서, 실은 이미 완료되어 하늘에 있는 진짜 '나'가 꾸고 있는 꿈을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꿈속에서 우리는 자아가 해체되는 고통을 겪는데, 그것을 우리는 환난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그 환난은 우리가 이를 악물고 견뎌내야 할 시험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죽는 순간까지 붙들어 살려두시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인내입니다. 목을 매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오늘도 살아있는 것이 이미 인내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인내의 끝에서, 이 세상의 모든 헛된 것들이 불로 다 타 없어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짜만 남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연단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십자가조차 없는 이 세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진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사모함, 그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신의 삶이 견디기 힘든 악몽처럼 느껴지신다면,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것은 당신이 제대로 가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이 꿈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가 부르던 그 노래, "집으로 가자"가 더 이상 그리움의 노래가 아니라, 마침내 도착한 자의 감격의 찬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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