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로마서 5:3~5)
1970년대 초, 내슈빌의 한 스튜디오에서 노래 하나가 녹음되고 있었습니다. 노래를 부른 사람은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입니다. 미 육군 소장의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고, 옥스퍼드에서 문학을 전공했으며, 한때는 전투기 조종사였고, 훗날에는 배우로 골든글로브를 거머쥐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스크린에서 사랑을 나누던 남자였습니다. 세상이 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인 명예, 재능, 사랑, 부를 다 가져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기타 하나를 붙들고 목이 메어 부른 노래가 "Why Me, Lord"였습니다. 주님, 왜 저를 구원해 주신 겁니까? 제가 이 행복을 누릴 만한 무슨 일을 했다고요? 저는 평생 모든 걸 낭비했습니다. 제 자신을 제가 잘 압니다. 이제 제게 당신이 필요하다는 걸 압니다. 제 영혼은 당신 손에 달려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은 실패자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인생에서 하고 싶은 걸 다 해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부른 노래는 성공의 찬가가 아니라 참회의 통곡이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자신에게서 나온 선한 일들조차 결국은 자기의 명성과 만족을 위한 것이었을 뿐, 단 한 번도 순전히 하나님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묻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구원하셨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그는 아무 대답도 준비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갚을 방법이 없다는 것,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스스로 걸어가던 길을 멈추고 이제는 손에 이끌려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이라는 것이 그의 유일한 고백이었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바로 오늘 우리가 도달해야 할 신앙의 자리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종착지는 "내가 이만큼 컸다"는 자랑의 자리가 아니라, "나는 도무지 갚을 길이 없다"는 이 처절한 항복의 자리입니다. 에베소서 1장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의 존재 이유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은혜만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해집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곧바로 그 찬송의 자리에 앉히지 않으시고, 굳이 이 길고 힘겨운 인생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하시는 걸까요?
몇 해 전, 신도시에 아파트를 분양받은 한 지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계약을 하기 전 모델하우스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의 거실은 완벽했습니다. 조명은 은은했고, 가구는 흠 하나 없었으며, 창밖으로는 합성된 공원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는 그 모델하우스를 보며 자신의 미래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2년 후 실제로 입주한 집은 어땠을까요? 벽지에는 못 자국이 남고, 아이는 벽에 낙서를 하고, 이사 온 첫날 밤 보일러가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모델하우스와 실제 삶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었습니다.
이 비유를 성경의 창조 이야기에 적용해보면, 창세기 1장이 그리는 창조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모델하우스'입니다. 안식으로 완성되는 완벽한 청사진, 곧 묵시(계시) 속의 창조입니다. 그런데 이 모델하우스 안에는 이상하게도 지워지지 않은 얼룩 같은 것들이 남아 있습니다. 어두움, 궁창 아래의 물, 땅 밑의 바다, 이것들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 불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무관한 '없음'의 잔여물들입니다.
그 없음의 자리에 말씀이 떨어집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창 1:3), 요한복음 1장이 말하는 바로 그 말씀, 곧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말씀이 떨어지자 빛이 어두움을 뚫고 나오고, 하늘의 물이 땅의 물에서 갈라져 나오고, 뭍이 바다를 뚫고 솟아오릅니다. 세 번의 분리, 세 번의 찢어짐입니다.
그런데 이 세 번의 찢어짐 각각에는 이미 십자가라는 약속이 숨겨져 있습니다. 첫째 날은 빛이 어두움에 비추었지만, 요한복음이 말하듯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이신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으나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둘째 날은 궁창이 위와 아래를 가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가면 궁창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서 찢어짐으로써 하늘과 땅이 다시 하나로 연합됩니다.
셋째 날은 뭍이 저주의 바다를 밀어내고 솟아오릅니다. 그런데 참 성전이신 예수께서는 오히려 그 저주의 바다에 빠져 죽으심으로 뭍을 완성하십니다. 요나가 사흘 밤낮 물고기 배 속에 있다가 나옴으로 니느웨가 살아났듯, 예수께서 죽음의 바다에 잠기심으로 우리가 살아납니다.
요한계시록에 가면 이 얼룩들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계 22:5), "바다가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오직 빛과 유리 바다와 하나님의 처소만 남습니다. 창세기 1장이 굳이 분리로 시작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 첫 페이지 안에 이미 십자가의 약속을 심어두시고, 동시에 우리가 살아갈 역사 속 새 창조의 원리를 미리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반전이 하나 있습니다. 묵시 속 창조에서는 '있음'이 '없음'을 삼켜버림으로 완성됩니다. 빛이 어두움을 이기고, 하늘이 땅을 덮고, 뭍이 바다를 몰아냅니다. 그런데 이 청사진이 실제 역사 속에서 펼쳐질 때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이것은 마치 거울에 비친 상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오른손을 들면 거울 속의 상은 왼손을 듭니다. 방향이 뒤집힙니다. 묵시가 빛이라면, 역사는 그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실체와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눕습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는 빛이신 예수께서 어두움에게 지십니다. 뭍이신 예수께서 바다에 빠지십니다. 완전하신 하늘의 성도가 이 땅에 내려와 도리어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5)로 끝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역창조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거꾸로 진행되는 방식을 택하셨을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확증해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한 어린아이가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아이는 자기 힘으로 자전거를 배우고 싶어 합니다. 아버지가 뒤에서 잡아주는 걸 원치 않습니다. "제가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몇 번을 넘어지고 무릎이 깨지고 나서야, 아이는 비로소 아버지의 손을 붙잡습니다. 아버지는 아이가 넘어지는 것을 막아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저는 혼자 할 수 없어요, 아버지가 필요해요"라고 고백하게 하시려고, 일부러 손을 놓으신 겁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음"의 자리에서 "없음"의 자리로 내려보내십니다. 내 노력과 능력과 자격으로는 결코 스스로 설 수 없다는 것을, 오직 십자가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출애굽기의 홍해 사건도 같은 패턴입니다. 불기둥이 애굽을 어둠으로 덮고, 바닷물이 갈라지고(할례와 같은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은 마른 땅을 밟고 건너갑니다. 이 모든 사건 속에 쪼개짐이 있고, 그 쪼개짐이 곧 구원의 통로입니다.
몇 해 전 어느 목사님이 한 성도님과 상담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20년이 넘은 분이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죄가 많은 것 같아요. 그때는 제가 참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목사님은 그분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건 집사님이 더 나빠진 게 아니라, 더 정확히 보게 되신 겁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겪는 자아인식의 붕괴입니다. 신앙의 연차가 쌓일수록 성도는 존재론적으로 더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던 죄의 실체를 점점 더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이것도 죄였어? 그럼 나는 정말 죄인 중의 괴수구나." 이 발견이 반복되면서, 성도는 처음의 확신인 "나는 구원받았다, 할렐루야!"와 지금의 현실인 "왜 구원받은 자에게서 나오지 말아야 할 것들이 더 많이 나올까" 사이에서 찢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쪼개짐입니다. 아픈 일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빛이 어두움을 찢고 들어갈 때 고통이 생겼듯이, 우리 안에 빛이신 말씀이 들어올 때 우리는 아픕니다. 어두움은 그대로 놓아두면 아프지 않습니다. 빛이 그것을 드러낼 때 비로소 고통이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이 태어날 때 가장 큰 고통을 여자에게 허락하셨습니다(창 3:16). 해산의 고통은 바로 이 역사 속 창조가 얼마나 아픈 것인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 아픔의 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게 됩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십자가만을 붙들게 됩니다. "예수님 아니면 안 됩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 붕괴를 통과한 뒤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단수로 지으십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창 1:26). 그 사람 안에 남자와 여자의 내용이 담겨 있지만, 아직은 하나입니다. 연합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2장에서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에서 나와 독립된 개체가 됩니다. 분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분리된 여자는 곧 남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선악과를 먼저 받아먹고 남자에게 건네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여자가 잘못했다"는 이야기로 읽으면 성경을 도덕책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자기를 지으신 남자(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여자(교회)의 모습을 통해, 오직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여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시는 그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전서 2장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이것을 두고 지난 수십 년간 교회는 "여자가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는가"를 두고 다투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핵심은 그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여자'는 선악과를 먼저 먹은 하와의 라인, 곧 자기 행위와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는 인본주의·율법주의를 상징합니다. 유대인들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신 '남자' 예수님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제사와 율법을 고집하다가 결국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바로 이 본문이 미리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하시는 방식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붙잡고 가르쳐서, 훈계해서 여자를 정신 차리게 만드는 방식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여자에게도 "내가 노력해서 살아났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남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자가 여자와 함께 죄인이 되어 함께 죽어버리는 길을 택하십니다. 세례 요한이 죄인들을 위한 세례를 베풀 때,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그 세례를 받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남자는 여자 때문에 죽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으로 여자가 삽니다.
창세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은 뱀에게 저주를 내리십니다.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그런데 바로 앞 구절에서 사람에게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뱀이 먹는 흙이 바로 우리,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라는 뱀에게 먹이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그리고 로마서 11장 31절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함에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우리의 순종 여부가 아니라, 우리가 그 긍휼을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순종 자체를 목표로 삼는 순간, 우리는 다시 가인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창세기 3장 15절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의 전쟁을 예고합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그런데 역사 속에서 이 전쟁은 어떻게 펼쳐집니까? 예수님은 뱀의 머리를 짓밟는 승리자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이라는 뱀에게 맞아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분의 발꿈치를 물어뜯으며 피를 빨아먹는 자들입니다. 마치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를 무는 하이에나 떼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피를 십자가에서 남김없이 다 내어주셨습니다. 그 피로 우리가 삽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사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인 언어로 다시 들려주는 것입니다. 모세는 두 이야기 사이에 정교한 언어적 대응을 심어두었습니다. "자기들이 벗은 줄 알고"(3:7)와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4:1), "네가 어디 있느냐"(3:9)와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4:9), "에덴동산 동쪽"(3:24)과 "에덴 동쪽"(4:16). 우연이 아닙니다. 같은 이야기를 다른 인물을 통해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첫아들을 낳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내가 여호와를 낳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 아이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하신 그 구원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키워보니 아니었습니다. 실망한 부부는 둘째 아이의 이름을 '허무·없음'이라는 뜻의 아벨(하벨)이라 지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없음'으로 지어진 아이로 말미암아, 나중에 셋이 태어나고 구원의 계보가 이어집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얼굴이 붉어지며 분노합니다. "내가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데 왜 안 받아주십니까?" 이것은 자기 행위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태도입니다. 반면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습니다. 첫 것과 기름은 레위기가 말하듯 하나님만의 몫입니다. 아벨은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 곧 믿음, 곧 그리스도를 드린 것입니다.
한 신학교 교수님이 예화로 자주 드시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험을 앞두고 두 학생이 있었습니다. 한 학생은 밤새 공부해서 만점을 받고 교수님 앞에 당당히 성적표를 내밉니다. "제가 이만큼 노력했으니 인정해주세요." 다른 학생은 시험을 앞두고 도무지 자신이 없어 이렇게 말합니다. "교수님, 저는 이 과목을 통과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통과시켜 주신다면 그건 순전히 교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바로 후자입니다. 자기 가치를 내세우는 제사가 아니라, "이것 없이는 저는 죽습니다"라는 고백의 제사입니다.
가인은 그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아벨을 쳐 죽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가인이 정말 죽이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자신의 제사를 거부하신 하나님을 죽일 힘이 없으니, 대신 그 앞에서 인정받은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니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의 실체는, 결국 하나님을 죽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의 안에 이 가인이 살아 있습니다. 내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서, 내 방식이 옳다고 우기고 싶어서,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을 죽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은 아벨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믿음이 그를 잘살게 해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그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오히려 말을 합니다.
복음서에 이 가인과 아벨의 패턴이 그대로 반복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죄인으로 알려진 한 여인이 예수님이 계신 잔치 자리에 들어와 값비싼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몸에 붓습니다. 원래 향유는 시신을 장사 지낼 때 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이 아직 살아 계신데 미리 장례를 치르듯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특히 유다는 분개했습니다. "이걸 팔았으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아서 가난한 자를 도울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이것은 정확히 가인의 논리입니다. "가치 있는 일을 해야지, 왜 쓸모없는 데 허비하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 하셨습니까?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 26:10, 13). 이 여인은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것과, 이분이 반드시 죽으셔야만 자신이 산다는 것을 믿음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죽기도 전에 미리 울며 그 발에 입을 맞추고 기름을 부은 것입니다.
이 여인의 삶이 곧 복음입니다. 가치 없어 보이는 일에 자신을 다 쏟아붓는 것, 세상이 보기에 "낭비"라 부르는 그 자리에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죽음과 자신의 삶을 연합시키는 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아벨의 삶이며, 향유를 깨뜨린 여인의 삶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보십시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 우리의 사고와 판단이 못 박히는 자리입니다. 손에는 못, 우리의 행위가 부정되는 자리입니다. 발에도 못, 우리가 스스로 자리를 이탈하려는 모든 교만이 정지되는 자리입니다.
세계 여러 종교에는 '오체투지'라는 수행법이 있습니다. 온몸을 땅에 던져 이마와 손과 발을 땅에 대고 수천 킬로미터를 기어가는 순례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자신의 헌신과 고행을 통해 스스로 하늘에 오르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몸으로 구원을 이루어내겠다는 몸부림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십자가는 정확히 그 반대의 그림을 보여줍니다. 오체투지에 사용되는 그 몸, 곧 머리와 손과 발을 아예 십자가에 못 박아버립니다.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하늘에 오르려는 그 모든 시도를 멈추고, 대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그 자리에서 완전히 무력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러므로 단순한 구원의 도구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우리의 처음 자리(없음), 그 자리를 벗어났을 때 겪는 결과(환난과 분리), 그리고 거기서 건짐받는 유일한 길(오직 은혜) , 이 세 가지가 모두 응축되어 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고, 믿음으로 인해 죽었습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5장도 같은 말을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고, 그 믿음이 우리를 환난으로 이끌어 인내와 연단을 거쳐 소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 소망에 이르는 길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가 죽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지금 이렇게 기도하고 계실지 모릅니다.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십니까? 은혜를 안다고 하면서도 왜 저는 계속 원망합니까? 도대체 왜 저 같은 걸 구원하셨습니까?" 만약 당신이 지금 그 기도를 드리고 있다면, 잘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자리입니다. 자기 신뢰가 무너지고, 자기 자랑이 부서지고, 오직 십자가만 남는 그 자리를 통과하고 나면 성경이 한 걸음 더 당신께 가까이 다가올 것이며, 당신은 그곳에서 비로소 참된 자유와 참된 찬송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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