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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말씀 묵상

로마서 -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확증된 사랑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29.

로마서 5장 5~12절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어느 마을에 재판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피고석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습니다. 죄목은 명백했습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있었고, 그녀 스스로도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법정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돌을 하나씩 쥐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
나는 저 여자와 다르다." 그 확신이 그들의 손을 무겁게, 그리고 정당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재판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도 없이 바닥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글씨를 보았습니다. 무엇을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사람씩 손에서 돌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이 많은 이부터, 그리고 젊은이까지, 법정 안에 남은 것은 결국 재판장과 피고인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8장의 장면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을 로마서 5장이 하려는 이야기도, 사실은 이 법정 장면과 다르지 않습니다.

로마서 5장 8절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구절을 하나의 공식으로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아직 죄인이었던 나" +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단어는 "아직"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반성하고, 나아지려는 몸짓을 보인 다음에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직" 죄인이었을 때, 아직 아무 준비도 안 되어 있었을 때, 그리스도는 오셨습니다. 이 순서가 뒤바뀌면 복음은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다.

이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쪽은 "
인생 뭐 있나, 하고 싶은 대로 살자"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몇몇 예술가들은 스스로를 '데카당'이라 부르며, 도덕이니 절제니 하는 것들을 낡은 껍데기로 여기고 벗어던졌습니다. "다들 연극 그만하고, 원래 하고 싶었던 대로 살자"는 것이 그들의 구호였습니다. 다른 한쪽은 정확히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우리는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며 자기 절제와 사회 개혁에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도덕 운동, 시민 운동, 자정 운동을 이끄는 이들입니다.

얼핏 보면 이 두 부류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대립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둘 다 결국 "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만들어가겠다"는 같은 욕망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쪽은 노골적으로, 한쪽은 세련되고 도덕적인 얼굴을 하고서 말입니다. 무대 위에서 입은 옷은 다르지만, 무대의 주인공은 똑같이 '나'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 두 번째 부류의 대표 격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자기 삶을 갈고 닦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 세리와 창녀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
우리는 이렇게 애써서 이만큼 왔는데, 저들은 왜 저렇게 사는가." 그 마음이 미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에도 세리와 창녀의 편에 서셨습니다. 그들이 잘 살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들만이 "
나는 도움이 필요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자기를 정화해온 바리새인들은 정작 그 고백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충분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온몸이 심하게 오염된 채로 거울 앞에 섰다고 해보십시오. 그는 자신을 씻어내기 위해 애를 씁니다. 열심히 문지르고, 향수도 뿌리고, 좋은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염된 것이 겉옷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 즉 존재 자체라는 데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옷을 걸쳐도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오염은 가려지지 않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인생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전 3:19~20) 이 말은 인간을 비하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을 걷어내려는 말입니다. 인생과 역사라는 무대는, 사실 이 진실 하나를 우리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리 좋은 옷을 걸쳐도 결국 흙으로 돌아갈 존재라는 진실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불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속출한 일이 있었습니다(민수기 21장).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놋뱀을 바라보는 자마다 살았습니다. 이상한 처방입니다. 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 다른 뱀을 쳐다보는 것이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바로 이 사건을 자신의 십자가에 빗대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4) 골고다 언덕에 세 개의 십자가가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가운데는 예수님, 좌우에는 두 명의 강도, 흥미롭게도 세 사람 모두 '죄인'의 자리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한쪽 강도는 끝까지 예수님을 조롱했고, 다른 쪽 강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1)
같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자기 실체를 인정했고, 한 사람은 끝까지 부인했습니다. 그 고백 하나가 그날 낙원과 심판을 갈랐습니다.

이것이 놋뱀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실체인, 하나님 없이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존재를 인정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바라볼 때, 그 순간 생명이 흘러 들어옵니다.

구약의 스가랴서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심판의 자리에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습니다. 그의 맞은편에는 그를 고발하는 참소자가 서 있습니다. 누가 봐도 여호수아 쪽이 불리해 보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뜻밖의 판결을 내리십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슥 3:4) 여호수아는 스스로 옷을 세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더러운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요한계시록도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하얗게 만든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로 씻겨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의로운 행실'이란, 우리가 이 땅에서 스스로 쌓아 올린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입혀 주신 그 옷 자체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8장의 여인은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이었습니다. 변명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 자리를 떠날 수도 없었습니다. 재판장 곁을 떠나는 순간, 밖에서 그녀를 정죄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몸을 굽혀 두 번, 땅에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이 직접 무언가를 '기록'하신 사건은 몇 번 되지 않습니다.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돌판에 새기셨을 때, 그리고 다니엘서에서 벨사살 왕의 잔치 자리 벽에 "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쓰셨을 때. 두 사건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실 때, 사람들의 숨겨진 실체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렘 17:13) 흙 위에 쓰인 글자는 바람 한 번 불면 사라집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애써 이름을 새기고 업적을 쌓아도, 그것은 결국 흙 위의 글씨처럼 사라질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땅에 무언가를 쓰시자, 참소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습니다. 나이 든 사람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젊은이까지, 자기 안에도 똑같은 실체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법정에는 두 사람만 남았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0~11) 여기서 예수님이 "나도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은, 단순히 너그러움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분은 실제로 이 여인의 자리에 스스로 서신 분입니다. 그녀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기에 하실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재판장이 정죄하지 않기로 하셨을 때, 그 어떤 검사도, 그 어떤 방청객도 다시 그녀를 고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는 인상 깊은 기도 하나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배반한 사건 이후,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구합니다.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 32:32)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기 이름을 내놓겠다는 이 기도는, 훗날 오실 참된 중보자인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기도와 정반대되는 약속도 함께 전합니다. 하나님께는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실패로도 흔들리지 않는, 창세 전에 이미 완성된 생명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자신의 성취로 그 이름을 지킨 것이 아니라 은혜로 이미 새겨진 것입니다.

열왕기상 19장에는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그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팔백오십 명과 홀로 맞서 싸운 인물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토로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오직 나만 남았거늘"(왕상 19:14) "나만 남았다"는 이 말 속에는 은근한 자부심이 배어 있습니다. 나만큼 열심인 사람이 없다는 항변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왕상 19:18) 엘리야가 알지 못했던 칠천 명, 이 대답의 요지는 숫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한 사람의 특출난 열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남겨두신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열심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우리의 열심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32절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역사가 증명해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법정에 홀로 남았던 그 여인처럼, 우리도 스스로는 결코 씻어낼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실체가 낱낱이 드러난 자리에서, 하나님은 오히려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시선이나 자신의 부족함 앞에서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
나는 아직 부족한데,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우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은, 이미 값없이 받은 은혜를 스스로 의심하는 태도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우리의 지금 모습이 여전히 부족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보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의지할 유일한 현실입니다.

법정에 남았던 그 여인은 그날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요? 성경은 자세히 말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녀는 더 이상 돌을 두려워하며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재판장이 그녀를 정죄하지 않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그 여인과 똑같은 판결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분으로 말미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