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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말씀 묵상

로마서 - 목 잘린 뱀에게 임한 은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1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로마서 5:3~5)

"
나는 주의 군병, 나는 진군하는 보병이니…"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가슴 한켠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율동까지 곁들여 신나게 부르던 그 노래 속에는 알 수 없는 전의가 있었습니다. 반드시 싸워 이겨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각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언제나 "나는 선한 편"이라는 확신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자라면서 그 노래를 부를수록 정작 내가 싸워야 할 대적의 얼굴은 점점 흐려졌습니다. 마귀, 사탄, 죄, 말은 익숙한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작 할 수 있었던 일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예의 바르게 살기, 법 잘 지키기, 하기 싫어도 마음을 다잡아 착한 일 한 가지 더 하기, 그렇게 하루하루 나름의 '전투일지'를 써 내려가며, 언젠가 하나님이 흐뭇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리라는 기대를 품고 살았습니다.

한 청년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
저는 매일 아침 그날 지켜야 할 규칙 다섯 가지를 종이에 적었어요. 거짓말하지 않기, 짜증 내지 않기, 험담하지 않기… 그리고 저녁마다 몇 개나 지켰는지 채점했습니다. 점수가 좋으면 잠도 편히 잤어요." 그 청년의 표정은 진지했지만, 이야기를 듣는 우리 모두는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대부분의 신앙생활의 민낯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매일 성적표를 주고받는 관계, 그것이 정말 성경이 말하는 '싸움'일까요?

성경은 전혀 다른 그림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11장 32절 이하를 펼쳐보면,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나옵니다. 조롱과 채찍질, 결박과 옥살이, 돌에 맞고 톱에 켜이고 칼에 죽임을 당하며, 양과 염소 가죽을 걸치고 광야와 산중과 토굴을 떠돌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구절을 읽으면 자연히 유관순 열사 같은, 이를 악물고 세상과 맞서 싸워 이겨낸 영웅의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본문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들이 "
무엇을 이겼다"는 말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냥 맞아 죽었습니다. 조롱당하다가, 궁핍하다가, 학대받다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번쩍 들어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네가 바로 주의 군병이다." 승리의 조건은 이 악물고 버텨내는 근성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고립되고 조롱당하다 끝내 쓰러지는 것이 성도의 '승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싸워야 할 대상은 세상 저편의 어떤 악한 세력이 아니라,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나 자신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을 야단치실 때마다 한 가지 표현을 즐겨 쓰셨습니다. "
목이 곧은 백성." 짐승 가운데 독이 오르면 목이 뻣뻣해지는 대표적인 존재가 뱀입니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향해 수시로 "이 뱀 같은 자들아" 하고 부르셨던 셈입니다.

군대에서 참호를 파본 사람이라면 이 그림이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산속 땅을 파다 보면 여기저기서 뱀이 튀어나오고, 야전삽으로 그 대가리를 내리찍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퍽퍽 울립니다. 작업이 끝나고 산을 내려올 때면 길가에 모가지 잘린 뱀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습니다. 발로 툭 차서 안 보이는 곳으로 밀어버릴 뿐입니다.

우리의 본모습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취급하셔도 할 말이 없는 존재, 그것이 "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목 잘린 뱀에게 다가오셔서, 마치 신랑이 신부에게 결혼 목걸이를 걸어주듯 우리 목에 은혜의 표를 걸어주셨습니다. 히브리 결혼 풍습에는 신랑이 신부에게 반드시 주는 목걸이가 있었는데, 그것을 받는 순간 신부는 평생 신랑에게 순종하기로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의 목이 꺾여야 신랑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이 연합관이, 바로 신랑이신 하나님과 신부인 우리 교회의 관계입니다.

한 은퇴한 목수가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
저는 젊은 시절 자존심이 강해서 누구 밑에서 일하는 걸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인생 막바지에 큰 병을 앓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제가 평생 목이 곧아서 하나님도, 사람도 제대로 섬긴 적이 없었다는 걸요." 그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병상에서 처음으로 제 목이 꺾이는 걸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게 자유였어요." 신앙생활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걸이가 내 목을 부러뜨리는 현실을 그대로 통과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기 첫 장부터 끊임없이 '분리'의 패턴을 보여줍니다. 그 분리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약속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계획(묵시)과 땅의 역사는 따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진행됩니다.

가인의 후손을 보십시오. 농업과 기술, 예술과 아름다움, 세상의 모든 화려한 것들이 그 계보에서 나왔습니다. 반면 아벨 대신 하나님이 세우신 셋의 후손은 초라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그저 "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뿐입니다(창 4:26). 세상이 부와 명예와 기술로 자기 힘을 쌓아 올릴 때, 셋의 후손은 아무것도 쌓을 수 없어 그저 이름 하나만 불렀습니다.

어느 시골 교회의 권사님 한 분은 평생 큰 사업도, 대단한 학벌도 없이 살았습니다. 자녀들이 "
엄마는 왜 그렇게 무능하게 사셨어요" 물으면 그저 웃으며 "나는 예수 이름 하나 붙들고 살았다"고 답할 뿐이었습니다. 세상 눈으로 보면 초라한 인생이지만, 그 권사님의 장례식장에는 그녀에게 빚진 은혜를 기억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셋의 후손들처럼, 이 땅에서 쌓을 것 없는 자들이 오직 이름 하나를 붙드는 삶, 그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노아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신 것은 "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뒤섞여 낳은 세상 전체의 타락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심판의 대상 안에 노아도 원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노아 역시 그 타락한 세대의 일원이었습니다. 다만 그에게 은혜가 임했을 뿐입니다.

노아가 구원받은 것은 그가 특별히 의로워서가 아니라, 방주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지은 것은 곧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20~21절은 "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물에 의해 구원받았다는 뜻입니다. 그 물이 세상을 심판했고, 방주 안의 사람들은 그 심판의 물을 통과하여 살아났습니다. 베드로는 이 물이 곧 세례이며, 세례는 곧 예수님이 마셔야 했던 십자가의 잔이라고 설명합니다(막 10:38~39). 물이 하는 일은 우리의 겉모습을 씻어 도덕적으로 훌륭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이 오직 하나님만 찾아가도록 우리 안의 우상, 나를 높이려는 그 마음을 부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큰 수술을 앞둔 환자와 같습니다. 수술 전날, 환자는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자신의 생사가 전적으로 의사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그는 온전히 내려놓습니다. 세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
나는 내 힘으로 살아날 수 없습니다"라는 항복입니다.

노아의 세 아들 중 함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형제들에게 알리며 비웃었습니다. 반면 셈은 아버지의 허물을 눈으로 보지 않고 조용히 덮어주었습니다. 이 짧은 일화 속에 신앙의 두 갈래 길이 담겨 있습니다.

함은 자기 기준으로 "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존경합니다. 부조리에 맞서 싸우고, 자기 힘으로 정의를 세우려는 사람은 신문 사설에도 실리고 사람들의 박수를 받습니다. 반면 셈처럼 자신의 허물조차 하나님의 은혜로 덮어야 함을 아는 사람은 세상 눈에는 무기력하고 소심해 보이기 쉽습니다.

한 성도가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동료를 보며 몹시 분개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엔 정의감에 불타 그 문제를 공론화하려 했지만, 기도하는 중에 문득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진짜 사랑인지, 아니면 자신을 옳은 사람으로 증명하고 싶은 욕망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는 결국 조용히 그 동료를 찾아가 위로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건네는 쪽을 택했습니다. 겉으로는 함처럼 나서서 싸우는 것이 더 통쾌해 보였겠지만, 그가 택한 것은 셈의 길인 판단하지 않고 덮어주는 은혜의 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당대 최고 문명의 발상지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평생 텐트에서 살았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10절은 아브라함이 "
약속하신 땅에 나그네처럼 우거하여"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 거하였다고 말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평생 고향을 떠나 낯선 땅을 떠도는 삶을 말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해외에 이민 가서 뿌리내리지 못한 채 평생 셋집을 전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민 생활을 해본 이들은 이 서러움을 압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그 땅의 완전한 주인이 되지 못하는 감각, 언제까지나 이방인으로 살아야 하는 현실, 아브라함의 인생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세상 눈에는 바벨론(갈대아)이 훨씬 화려하고 성공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바벨론은 늘 찬란하게 묘사되지만, 하나님의 두 증인은 늘 얻어맞고 죽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계 11:8).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화려함을 부러워하는 대신 "
더 나은 본향," 즉 하늘의 성을 바랐습니다(히 11:16). 그것이 계시록 7장 14절이 말하는 "큰 환란에서 나온 자들"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 전체가 환란이며, 그 환란을 통과해 하늘의 처소를 덮어쓰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 "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흔히 도덕적 황금률로만 읽힙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마태복음 5장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라"는 선언과 이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우리를 먼저 대접하셨고, 우리가 그 대접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은 그 십자가 공로만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창세기 18장 아브라함이 세 나그네(사실은 천사들)를 극진히 대접한 장면에서 이미 예표됩니다. 히브리서 13장 2절은 "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말합니다. 반면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는 나그네를 이용하고 짓밟으려 했을 뿐, 결코 진심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 23장 14절은 이 소돔의 죄를 놀랍게도 예루살렘의 선지자들, 곧 종교 지도자들에게 적용합니다. 겉으로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하나님을 자신을 위해 이용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 비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재판장 되신 예수님이 "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다"고 말씀하시자, 양들은 오히려 되묻습니다.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자신이 한 선행을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염소들은 "제가 했잖습니까" 하며 자신의 행위를 항변합니다.

이 비유를 단순히 "
가난한 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말라"는 도덕적 교훈으로만 읽으면 핵심을 놓칩니다. 실제로 어떤 이는 길에서 노숙인을 씻기고 먹였더니 그가 예수님으로 변하더라는 간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진짜 무게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옥에 갇힌 그 모든 자리는 원래 우리 자신의 처지였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 밑바닥까지 내려오셔서 우리를 대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그분은 "
내가 생명의 떡이니 나를 먹으라" 하셨고, 7장에서는 "내가 생수니 마시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은 그분이 우리 질병을 친히 짊어지셨다고 증언합니다. 그 은혜를 진심으로 아는 사람은 연약한 이웃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느 권사님이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청년을 오랜 세월 묵묵히 품어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
언제까지 저 사람을 도우실 겁니까" 물으면,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나은 게 뭐가 있어서요. 나도 예수님 아니었으면 저 사람보다 나을 것 하나 없어요." 그것이 양의 마음입니다.

이사야 53장 6절이 말하듯 "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내가 바로 그 심판받아 마땅한 양이었음을 아는 것이 은혜의 출발점입니다.

이삭은 이스마엘에게 늘 조롱당했고, 결국 모리아 산에서 죽임 당할 뻔한 자리까지 갔습니다. 야곱은 에서에게 죽임당할까 평생 두려워하며 비겁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세상 눈으로 보면 에서가 훨씬 남자답고 정의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신 것은 야곱이었습니다.

늙은 야곱이 바로 왕 앞에서 자기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한 장면이 있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애굽의 왕 앞에서, 세상의 절정 권력 앞에서, 초라한 한 노인이 내뱉은 이 고백이야말로 성도의 인생을 요약하는 말입니다.

신명기 2장 4~6절을 보면, 하나님은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에게 에서의 땅을 절대 건드리지 말고 필요한 것은 돈을 주고 사 먹으라고 명하십니다. 이 땅의 풍요는 애초에 성도의 몫으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늘 그 풍요를 곁눈질했습니다. 신명기 9장 6절은 단호합니다.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 때문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가나안 땅 문턱에서도 여전히 "뱀 새끼"라는 진단이 내려집니다.

어느 은퇴 장로님이 이런 고백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
저는 젊었을 때 사업으로 남들보다 잘살았습니다. 그때는 그게 다 제 신앙과 성실함 때문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업이 무너지고 빈손이 되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잘될 때도 못될 때도, 저는 그저 목이 곧은 사람이었을 뿐이었다는 걸요." 성도의 삶이란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굴곡을 겪으면서도, 오직 십자가를 붙드는 손의 힘만이 점점 강해지는 여정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결론처럼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열두 살 된 딸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집으로 가시는 길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한 여인이 다가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유대 율법에서 열두 살은 혼인이 가능한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야이로의 딸은 그 나이에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혈루증의 여인은 열두 해 동안 피를 흘리며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찍혀 살았습니다. 그 어떤 남자도 그녀에게 손댈 수 없었습니다. 생과부와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십이 년 만에 처음으로 만진 것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율법대로라면 부정한 여인이 남을 만지면 그 사람이 부정해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 여인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여인이 무엇을 잘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그저 십이 년간 죽어 있던 자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녀의 부정함을 자신에게로 가져가시고, 그녀를 신부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곧이어 죽어 있는 야이로의 딸에게로 가셔서 그녀를 살리십니다. 열두 해를 죽어 있던 여인과 이제 막 죽음을 맞은 열두 살 소녀, 둘 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신랑 되신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그들을 살리셨습니다.

이 두 이야기 바로 앞에는 예수님이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장면, 그리고 낡은 옷에 새 천을 붙이지 않고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지 않는다는 비유가 놓여 있습니다(막 2:15~22). "
신랑이 와 있는데 어찌 슬퍼하며 금식하겠느냐"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낡은 율법의 굴레를 벗고 은혜의 잔치에 참여하라 초청하십니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피 흘리는 부정한 자들입니다. 목이 곧은 뱀입니다. 세상의 화려한 가인의 후손들, 강성한 에서들, 번영하는 바벨론을 곁눈질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모든 연약함 한가운데로 예수께서 다가오셔서 손을 내밀어 끌어 올리십니다.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이 어떻게 함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목은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부수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환란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5장이 말하듯, 그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냥 살아 있으면 됩니다. 화려하게 이기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가만히 살아 있다 보면, 그 신랑 되신 예수께서 반드시 찾아오셔서 당신의 손을 확 끌어 올리시는 그날이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