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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말씀 묵상

로마서 - 별일 없이 사는 사람, 로마서 5장이 그리는 인생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6.

로마서 5장 5~11절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어떤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갑작스러운 감사에 걸려 억울하게 누명을 썼습니다. 자신이 하지 않은 일로 징계위원회에 불려가고, 동료들의 눈초리가 달라지고, 몇 달 사이 몸무게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밤마다 눈물로 기도했지만, 아침이면 다시 출근했고, 사람들 앞에서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몰아세우던 사람이 먼저 지쳐 나가떨어졌습니다. “
저 사람, 왜 저렇게 멀쩡하지?” 하는 말이 사내에 돌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대개 “
참 대단한 신앙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단해서가 아니라, 이게 원래 제 인생인 걸 알아서요.” 그가 말한 뜻은 이랬습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깎이고 무너지는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 낯선 재난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원래 주어진 몫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이라 부릅니다(히브리서 11장). 산과 굴에서 떠돌고, 돌에 맞아 죽고, 톱에 켜여 죽은 사람들, 세상 기준으로 보면 그들의 삶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을 “별일 없이 산 사람들”이라 기록합니다. 세상이 작정하고 별일을 던졌는데, 그 별일에 짓눌리지 않고 살아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흔히 오해가 생깁니다. “
그들은 아픔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었나?” 그렇지 않습니다. 돌에 맞으면 아프고, 톱에 켜이면 두렵습니다. 다만 그들 안에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습니다. 지금 겪는 고통이 자신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헛된 자부심과 자기 확신을 걷어내는 과정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 백신의 비유가 도움이 됩니다. 백신은 진짜 병균의 일부를 몸에 넣어 면역을 만듭니다. 맞는 순간은 따끔하고, 때로는 열이 나고 몸살을 앓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몸을 망가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큰 병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이 그리는 성도의 고난도 이와 비슷합니다. 지금 겪는 아픔이 영원한 심판, 곧 진짜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예방접종과 같다는 것입니다.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에는 방향과 목적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은 이 원리를 성령의 일하심으로 설명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편안하고 순탄한 삶을 만들어 주시는 게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은 고난의 자리로 이끄십니다(롬 8:17). 마치 부모가 자녀를 무작정 편하게만 키우지 않고, 때로 일부러 힘든 훈련을 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이 비유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부모의 훈련은 자녀가 스스로 강해지도록 돕는 것이지만, 성령의 일하심은 오히려 우리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 받은 사람도 여전히 자기 생존을 위해 기도하고, 무엇을 마땅히 구해야 할지조차 모릅니다(롬 8:26). 그럴 때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그 잘못된 기도까지 도로 걷어내시는 것입니다.

어느 재판을 상상해 보십시오. 피고인석에 선 사람은 자신의 죄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증거도 명백하고, 변명의 여지도 없습니다. 그런데 판사가 선고를 내리기 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법정에 있던 누군가가 일어나 “
제가 저 사람 대신 형을 받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실제로 그 형벌을 대신 짊어집니다. 피고인은 아무 조건 없이 풀려납니다.

이 장면이 바로 로마서 5장 6~8절이 말하는 내용입니다. “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우리가 착해져서, 노력해서, 조금이라도 자격을 갖추어서 그리스도가 죽으신 게 아닙니다. 여전히 죄인이고 여전히 원수인 상태 그대로, 그리스도가 먼저 죽으셨습니다. 법정의 비유로 말하면, 피고인이 반성문을 써서 감형을 받은 것이 아니라 무죄한 자가 대신 형벌을 짊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겪는 환난의 목적도 분명해집니다. 환난은 우리를 더 착하고 강한 사람으로 개조하기 위한 훈련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
나는 여전히 죄인이며, 여전히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깨닫게 하는 자리입니다. 그 깨달음은 아픕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하고, 때로는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로마서 5장 5절은 그것이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즉 수치스럽게 하려는 게 아니라 성령을 통해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좌우에는 각각 강도가 하나씩 달려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둘 다 예수를 조롱했습니다. “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한 강도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는 옆 사람을 꾸짖으며 말합니다. “너와 나는 우리 죄에 마땅한 벌을 받는 것이지만, 이분은 옳지 않은 일을 하신 적이 없다.” 그리고 예수를 향해 이렇게 구합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 사람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손과 발이 다 못 박힌 채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말 한마디, 구조 요청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답하십니다. 이 장면은, 구원이 우리의 선한 행위나 종교적 실천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임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세례도 받지 못했고, 헌금도 봉사도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죽어 마땅한 자임을 인정하고, 옆에서 함께 죽어가는 이가 왕이심을 믿음으로 알아본 것,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같은 시각, 예루살렘의 감옥에는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바라바입니다. 폭동과 살인죄로 사형이 확정된 죄수였습니다. 그런데 명절 특사 관례에 따라 군중은 예수 대신 바라바를 풀어 달라고 요구했고, 결국 바라바는 아무 조건 없이 석방되었습니다. 그가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를, 죄 없는 예수가 대신 지셨습니다.

바라바가 그 후 살면서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를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
저기엔 원래 내가 달려야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저분이 내 자리에서 죽으셨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받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다른 이가 대신 짊어졌다는 사실 앞에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는 자리입니다. 에베소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우리 각자가 실은 그 바라바의 자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 하박국은 억울했습니다. 하나님께 “
어찌하여 악인이 의인을 삼키는데도 가만히 계십니까” 하고 항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더 당혹스러웠습니다. “내가 더 악한 나라를 들어 너희를 심판하겠다.” 하박국이 다시 항변하자 하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자격을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대화 끝에 하박국은 몸이 떨리는 심정을 고백합니다. 다가올 재난을 생각하니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린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도달한 결론은 뜻밖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구원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찬송하고 기뻐하리라”(합 3:17~18). 그가 기대던 모든 삶의 근거인 수확, 가축, 생계가 다 무너져도, 그는 여전히 노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흉년이 지나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흉년 한가운데서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손에서 자랑할 만한 모든 것을 걷어내신 것, 그것이 오히려 구원이라는 사실을 그는 깨달은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탕자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흔히 사람들은 이 비유를, 방탕한 아들이 “
정신 차리고” 스스로 뉘우쳐 아버지께 돌아온 이야기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순서가 다릅니다. 아들이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돼지우리에서 배를 곯다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자”고 결심하는 장면 이전에, 이미 아버지는 날마다 그 길목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먼저 그를 보고 달려나가 껴안습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아들의 결심이 아버지의 사랑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회개란, 인간이 스스로 각성해서 자기 힘으로 돌아서는 사건이 아니라, 아버지가 먼저 자녀를 그 깨달음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사건입니다. 다 잃고 나서야, 자신이 붙들고 살았던 것들이 실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 같은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 그 과정 전체가 아버지의 손 안에 있었습니다.

몇 해 전, 한 중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습니다. 유서에는 부모나 친구에게 남기는 말이 아니라, 뜻밖의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
나를 유일하게 사랑해 주었던,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아이팟을 나와 함께 묻어 주세요.” 부모는 오열하며 말했습니다. “우리만큼 이 아이를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 맞벌이를 하면서도 하루에 서너 개씩 과외를 시켜주며 모든 걸 다 쏟았다.

이 비극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거짓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사랑은, 아무리 진심이어도 결국 자기 방식대로 상대를 사랑하려는 경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쏟아붓지만, 정작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과는 어긋날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사랑을 정죄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채우는 것은 결국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은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처음 이야기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무너지지 않았던 그 집사님은 특별히 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는 자신이 겪는 고난이 자신을 파괴하려는 재앙이 아니라, 여전히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자신이 정죄받아 마땅한 자리에서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미 확증받았습니다.

로마서 5장이 말하는 복음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나아져서, 자격을 갖추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인 된 모습 그대로 사랑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 찾아오는 환난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우리 안에 이미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이 보기에 결코 평탄하지 않은 삶 속에서도 별일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