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 전통에서 오래도록 물어온 질문이 있습니다. "왜 인생은 이토록 버겁고 고통스러운가?" 그 답으로 제시된 것이 삼독, 곧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뿌리를 파고 내려가면 결국 '나'라는 존재, 아상에 이릅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인 '나'를 붙잡고 있기에 인간은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장미는 그저 장미로 피어 있을 뿐인데, '나'는 장미를 좋아하고 잡초를 미워합니다. 그 좋고 싫음, 그 판단이 모든 욕망과 고통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이 통찰은 놀랍도록 날카롭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도 똑같은 진단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다만 처방이 다를 뿐입니다.
한 중년의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건강을 잃고, 마지막엔 가족과의 관계까지 무너지던 시절, 그는 상담자에게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걸 하나씩 손에 넣을 때마다 왜 더 허기가 지는 걸까요? 성공하면 만족할 줄 알았는데, 성공하고 나니 더 큰 성공이 없으면 불안해요." 이것이 바로 본문이 말하는 "결핍은 오직 죽음으로써만 소멸한다"는 인간의 조건입니다.
성경은 이 갈증의 뿌리를 '나'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죄로 병든 '나'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바라볼 때 일어난 일을 기억해 보십시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 3:6).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원래 선했습니다. 나무도, 열매도, 그것을 바라보는 눈도 본래는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나'를 앉힌 순간, 모든 판단의 중심이 뒤틀렸습니다.
"'나'가 가치의 판관이며 욕망의 원천"이 되어버린 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즉 불교는 문제를 정확히 짚었지만 그 문제에 붙인 이름이 다릅니다. 문제는 '자아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없는 자아의 왕 노릇, 곧 죄입니다. "'나'를 버리려면 '나'를 버릴 '또 다른 나'가 필요하다. 무욕은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뼈아픈 자백입니다.
불면증과 씨름하며 "생각을 멈춰야지, 멈춰야지" 되뇔수록 오히려 더 잠들지 못했던 경험을 떠올려 보십시오. 생각을 멈추려는 그 노력 자체가 또 하나의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를 지우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나'의 또 다른 활동일 뿐입니다. 아무리 정교한 수행과 반성을 거듭해도, 우물 속에서 자기 발을 딛고 자기를 들어 올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똑같은 절망을 토로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바울은 율법으로, 곧 자기 의지와 노력으로 자기 안의 죄와 씨름했지만 결국 실패를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평범한 사람은 기껏 입술에 담을 일일 뿐"이라는 통찰과 정확히 만나는 지점입니다. 도덕적 결심, 명상, 수행만으로는 자아의 근본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여기서 복음은 불교와 결정적으로 갈라섭니다. 불교는 자아의 소멸, 곧 적멸(열반)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아의 소멸이 아니라 자아의 죽음과 부활을 말합니다. 이 둘은 완전히 다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여기서 바울은 '나'가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다만 그 삶의 중심축이 '나' 자신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래된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낡은 자재를 아무리 손봐도 무너질 집이라면, 필요한 것은 개선이 아니라 철거와 재건입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거듭남은 옛 자아의 개선이 아니라, 옛 자아의 죽음과 전혀 새로운 생명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씨름할 욕망의 진정한 문제는,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욕망의 형상이다." 생명을 북돋우고 영혼을 성장시키는 선하고 아름다운 욕망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정확히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37편 4절은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욕망을 뽑아버리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욕망의 방향을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갈증 자체가 죄가 아니라, 그 갈증을 채우려고 파놓은 웅덩이가 "터진 웅덩이"(렘 2:13)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알코올 중독에서 회복한 형제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술을 끊기 위해 수십 번 자기 의지로 싸웠지만 매번 실패했습니다. 그러다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제 욕망이 사라진 게 아니에요. 저는 여전히 무언가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이제는 그 갈망이 술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하게 됐어요."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자아를 소각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 자아 안에서 욕망의 방향 자체를 새롭게 빚어가시는 과정입니다.
불교의 결론은 적멸, 곧 모든 것이 사라진 텅 빈 고요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리는 종착지는 텅 빈 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온전히 닮은 충만한 새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나'를 없애려는 모든 인간적 시도는 결국 물로 물을 씻으려는 헛수고로 끝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죽은 '나'는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 전에는 자기중심으로 굽어 있던 그 눈이 이제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펴집니다. 이것이 복음이 주는 진짜 자유입니다. 자아의 소멸이 아니라, 자아의 구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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